공공서비스디자인의 이해 - 윤성원

2026. 9. 8. 22:29서비스디자인/서비스디자인이란?

공공서비스는 공급자의 시선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려면 실제 사용자의 경험과 행동을 관찰해야 합니다. 디자인은 결과물을 꾸미는 역할을 넘어, 정책 기획 초기부터 문제를 재정의하며 대안을 실험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공공부문의 디자인이 공공디자인에서 공공서비스디자인, 정책디자인으로 확장될 때 인간 중심적인 행정과 정책혁신이 가능합니다.

공공서비스디자인의 이해
과정명 : 고급리더과정
대상 : 지방직 4급 공무원 129명
일시 : 2026.9.8.(화) 10:00~11:30
장소: 지방자치인재개발원 

202600908_공공서비스디자인의 이해_지방자치인재개발원(2시간)_윤성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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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며

반갑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디자인에 관한 내용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저도 매우 기쁩니다.
여러분의 교육과정도 이제 4분의 3 정도가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남은 시간도 의미 있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한국디자인진흥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약 28년째이고요.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디자인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970년에 설립된 기관입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디자인이 공공부문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먼저 휴대전화로 간단한 질문 하나에 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응답 결과를 함께 보겠습니다. 여러분 화면에서 ‘응답 보기’를 누르면 결과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Q1. 디자인이 기여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⑤+ ④ = 67.8%
⑤ 조직·제도·정책 시스템의 작동 방식까지 개선하는 것 47.8%
④ 사용자를 이해해 정책·사업의 문제를 찾 고 기획하는 것 20%

오늘은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기대하시는 것과는 조금 다른 디자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정책’과 ‘디자인’은 얼핏 보면 잘 연결되지 않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 업무와 연결되는 내용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수요자 중심’이라는 말을 너무나 익숙하게 듣습니다. 이미 세상이 상당히 수요자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기술 중심이고 공급자 중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디자인은 기술 중심을 인간 중심으로, 공급자 중심을 수요자 중심으로 바꾸는 데 활용될 수 있습니다.

 

2. 공급자와 수요자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산다

‘수요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은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Bain & Company가 세계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관리자들에게 물었을 때는 약 80%가 “우리 기업은 고객에게 경쟁사보다 우수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고객에게 같은 취지로 물었을 때 그렇게 느낀다는 응답은 약 8%에 불과했습니다.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의 인식 격차가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정말 수요자 중심인가’라는 판단은 공급자가 아니라 수요자가 해야 합니다. 글로벌 선도기업도 이 정도의 격차가 있다면, 우리나라 공공서비스는 과연 더 높은 수준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키오스크와 고령자: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를 결정한다

여러분 가운데 이미 보신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영상인데, 고령자가 맥도날드 키오스크를 이용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영상] 박막례 할머니 햄버거 주문하기  '가고 싶어도 못가는 식당'

영상에는 고령자가 키오스크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면서 메뉴를 찾지 못하고, 화면의 단계가 자꾸 넘어가고, 음료와 사이드 메뉴를 구분하기 어려워하고, 카드 결제와 영어 표현 때문에 계속 막히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 정도의 사용자 관찰만 해도 굉장히 많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용성 조사에서는 통상 소수의 사용자만 관찰해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요 문제를 상당 부분 발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규모 조사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가 서비스를 수행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구상하실 때는 꼭 실제 사용자를 통해 “이게 정말 작동하는가?”를 실험하고 테스트하는 단계를 넣으셨으면 합니다.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시행하기 전에 실제 상황에서 시험하고, 관찰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영상에 굉장히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제가 주목했던 반응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키오스크를 처음 사용할 때는 어느 정도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문턱이 아주 높지는 않기 때문에 금방 극복하고, 한 번 익숙해지고 나면 처음의 불편함을 잊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그 문턱 자체가 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약자를 무시하면 다음은 나다”라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나이가 듭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갈 환경이 약자에게도 포용적인 환경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으며,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사회입니다. 음식점의 키오스크나 각종 무인화 시스템도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일할 사람은 줄어들고, 기술 도입은 빨라지고, 공공부문도 같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기술을 빨리 받아들이는 만큼, 기술에서 소외되는 사람에 대한 대응도 함께 빨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사람은 공급자가 예상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아파트 단지 안에 과속방지시설이 설치된 사례를 생각해 봅시다. 도로가 굽어 있어 사고가 발생하니, 공급자는 “시설물을 설치하면 속도를 줄이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급자가 예상한 방식으로만 행동하지 않습니다. 시설물을 피하려고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위험이 생기기도 합니다.
정책이나 시설을 만드는 사람은 흔히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용자는 꼭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 공급자 중심 접근의 허점이 있습니다.

 

5. 샴푸와 린스: 작은 불편을 알아차리는 것

여러분도 샤워하다가 샴푸인 줄 알고 집었는데 린스였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물이 흐르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샴푸와 린스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브랜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같은 브랜드의 제품은 용기 형태와 그래픽을 비슷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작 사용자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정보인 ‘샴푸인지 린스인지’는 작게 표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디자인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Kao는 소비자의 의견과 시각장애인의 사용 경험을 조사한 뒤, 1991년부터 샴푸 용기 측면에 촉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돌기, 즉 ‘기자기자(きざみ)’ 표시를 적용했습니다. 눈을 감고 머리를 감는 사람도 손으로 샴푸와 린스를 구분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 방식은 다른 기업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국제표준 ISO 11156:2011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사용자에게 편리한 방식이 업계의 공통 기준이 된 사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불편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작은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문턱의 존재 자체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약간 예민하게 사용자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세련된 방식도 가능할 겁니다. 예를 들어 용기 표면을 다르게 만든다면 눈을 감고 만지는 것만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실제 제품은 아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샴푸 케이스 콘셉트디자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해결 방법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6. 200년째 바닥에 있는 자판기 배출구

자판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사용하기 편리하십니까?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자판기를 이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셨나요?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왜 고령자는 자판기를 잘 이용하지 않을까요? 동전 투입식 자판기가 등장한 지 200년 가까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음료 배출구는 여전히 바닥 가까이에 있습니다. 초기 기계식 자판기는 구조상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식이 자연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기로 작동합니다. 굳이 음료를 바닥 가까이 떨어뜨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관행은 계속됩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기 어려운 고령자에게는 큰 불편입니다.
자판기 제조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령자는 원래 자판기를 잘 사용하지 않으니 우리의 핵심 고객이 아니다.” 하지만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사용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새로운 기술을 넣으면 해결될까요?
최근 자판기는 터치스크린이 붙고 조작 방식은 더 첨단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료 배출구는 여전히 아래에 있습니다. 고령자 입장에서는 불편이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터치스크린이라는 새로운 장벽이 하나 더 생긴 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민감하게 세상을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이 불편한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세상은 계속 공급자 중심의 관행을 반복합니다. 과거에는 디자인을 주로 눈에 보이는 형태를 만드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약 20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디자인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서비스와 경험,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다루는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7. 디자인은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문제 정의의 앞에 와야 한다

가상의 사례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지자체에 작은 공공수영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이용객이 갑자기 크게 줄었습니다. 담당자들은 시설이 낡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리노베이션을 결정하고 상당한 예산을 마련했습니다. 건축사무소를 선정하고 첫 번째 프레젠테이션을 받았는데, 건축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공사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사해 보니 두세 달 전 셔틀버스 시간표가 30분 정도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출근 전에 수영장에 들러 운동하고 출근할 수 있었는데, 버스 시간 변경 때문에 그 동선이 깨진 것입니다.
문제는 건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수십억 원을 들여 시설을 고쳐도 이용객은 돌아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책디자인 분야에서 자주 소개되는 사례입니다. 실제 여부와 별개로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공공부문에서 디자인은 대체로 문제 해결의 맨 마지막에 투입됩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모두 끝낸 뒤 “여기에 뭘 만들어 주세요”, “이걸 보기 좋게 해 주세요”라고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식입니다.
그 단계에서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디자인은 단지 형태를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불편함을 느끼는지,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실제로는 핵심 문제인지 포착하는 역할도 합니다.
디자인을 문제 정의 단계까지 앞당겨 투입하면 선택지가 훨씬 많아집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예산을 쓰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다.

 

8. 정책 과정에서 디자인은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가


Q2. 실제 여러분 조직에서는 디자인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으신가요?

① 홍보물·브랜딩·시각정보    84.1%
② 공공공간·시설·환경          77.8%
③ 웹·앱·디지털서비스          44.4%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항목 세 가지를 골라 주십시오. 세 가지보다 적다고 생각되면 적게 선택하셔도 됩니다.
결과를 보니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있네요. 여러분이 관리자분들이라 실무자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을 잘 모르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Q1에서 67.8%가 디자인이 정책과 조직까지 갈 수 있다고 답했지만, 실제 조직에서는 84.1%가 홍보물, 77.8%가 시설·환경에 쓰고 있고 정책기획·사용자조사는 17.5%뿐이다.
①·② (전통적인 디자인 역할로 활용) 평균: 81.0% 
⑥·⑦ (문제를 푸는 방법으로서 디자인 역할로 활용) 평균: 7.1% 
차이: 73.9%p 
결과물 중심 활용이 조직·협업 중심 활용보다 약 11.4배 높다. 그 간극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공공디자인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임기제 공무원 등이 8백명 이상 있습니다. 이분들은 주로 환경, 시설물, 공간과 같은 영역을 담당합니다.

정책 과정으로 보면 현재 디자인은 주로 뒤쪽, 즉 정책 집행 단계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책 형성과 정책 수립이 이루어지는 앞부분입니다.
초기 기획이 잘못되면 뒤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의미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의 수영장 사례가 그렇습니다.
기획 단계에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여 수요자를 조사하고 문제를 다시 정의하면, 전체 예산을 줄이면서도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기존 디자인 활용은 이미지, 시설물, 공간 등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공공서비스나 정책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도 디자인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9. 건널 수 없는 횡단보도와 복잡해지는 이해관계자

공공정책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보겠습니다.
수원지방법원 앞에 한때 사실상 건널 수 없는 횡단보도가 있었습니다. 횡단보도, 신호등, 가로수 등을 담당하는 부서가 각각 다르다 보니 각 부서가 자기 일은 했지만 전체를 함께 보지 못해 이런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이후 민원으로 개선됐습니다.

공공정책은 이해관계자가 매우 복잡합니다.
자동차 정비 서비스와 관련된 정책만 해도 여러 부처, 공공기관, 사업자, 소비자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연결됩니다. 어떤 규정 하나를 바꾸더라도 여러 주체가 모여 합의해야 합니다.
10년 뒤에는 이해관계자가 지금보다 단순해질까요, 더 복잡해질까요? 아마 훨씬 복잡해질 겁니다.
사회문제는 이른바 ‘wicked problem’, 즉 난제로 불릴 만큼 서로 얽혀 있습니다. 고령화, 지역소멸, 안전, 복지 같은 문제는 어느 한 부서가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문제가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10. 3색 화살표 신호등: 홍보가 아니라 사람 이해의 문제

예전에 좌회전 신호등을 네 개에서 세 개로 줄이기 위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2011년 광화문 등을 포함한 여러 교차로에서 시범운영한 3색 화살표 신호등입니다.
빨간색 왼쪽 화살표가 켜지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빨간색이니 가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는 ‘화살표는 그 방향으로 가라는 표시’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부 운전자는 이를 직관적으로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 시범운영 과정에서 혼란과 사고가 발생했고 시민 반발도 컸습니다. 결국 제도는 철회됐습니다. 당시에는 “홍보가 부족했다”는 식의 설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홍보의 문제일까요?
사람이 색과 화살표에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은 홍보만으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정책을 만들 때 실제 사용자의 인지와 행동을 충분히 실험하지 않은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정책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지점입니다. 사람을 교육해서 시스템에 맞추기보다,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11. Mayo Clinic: 왜 병원에 디자이너가 필요한가

다른 영역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 Mayo Clinic입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병원이고, 지속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기관입니다.
이곳에는 Center for Innovation이라는 혁신조직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아주 큰 조직은 아니지만, 환자 경험을 중심으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기존 서비스를 바꾸는 일을 해 왔습니다. 국내 주요 병원들도 이런 사례를 참고해 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조직 안에 서비스디자이너와 디자인 전공자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디자인은 그림을 그리거나 형태를 꾸미는 일이 아니라, 환자와 의료진의 경험을 새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병원은 본질적으로 혁신과 긴장 관계가 있습니다. 의료는 신뢰성과 안전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척추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저희 병원은 계속 새로운 수술법을 실험합니다”라고 한다면 쉽게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검증된 방식을 수천 번 수행한 병원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의료의 속성상 안정성과 책임성이 중요합니다.
반면 디자이너는 계속 똑같은 것만 만들고 싶어 하면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험하는 것이 직업적 성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병원 조직 내부의 안정성과 책임성을 유지하면서도 혁신을 만들기 위해 서로 다른 성향의 인력을 의도적으로 결합한 것입니다.
IDEO 같은 디자인기업이 Mayo Clinic과 협력하면서 이런 혁신조직의 필요성을 제안했고, 외부의 다양한 전문인력을 조직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후 여러 병원에서도 비슷한 혁신팀을 만들고 디자이너를 채용하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혁신을 하려면 ‘오늘부터 혁신적으로 일하세요’라고 기존 조직에 지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실제 조직 안에 있어야 합니다.

 

12. 영국 Policy Lab: 정부 안의 실험조직

이걸 정부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영국 정부의 Policy Lab입니다.
Policy Lab은 2014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중앙정부 안에 있는 작은 혁신팀과 비슷합니다. 디자인, 혁신, 사람 중심 접근을 통해 정책을 더 잘 만들기 위한 조직입니다.
이 조직에는 디자인 연구, 예술, 민속지학, 데이터, 공동디자인 등 다양한 배경의 인력이 함께 일합니다. 공무원 조직 내부만으로는 하기 어려운 새로운 시도를 내부에서 계속 제안하고 실험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복지, 노동, 보건 등 여러 부처와 관련된 문제를 다룰 때 담당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이 상황에서는 누가 무엇을 맡아야 하는가”, “어떤 기관이 협력해야 하는가”, “상황이 악화되면 정부 역할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를 함께 시각화하고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퍼실리테이션입니다. 누군가 답을 일방적으로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문제를 이해하고 합의할 수 있도록 회의를 디자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지자체에 이런 조직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직 흔하지 않습니다. 과거 한국행정연구원 등에서 여러 나라 정부가 왜 내부에 디자인 조직을 두는지 연구*한 적은 있지만, 실제 정부 조직 안에 이런 기능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정부 혁신을 위해 디자인사고 도입을 연구하는 한국행정연구원의 연구보고서 모음 2018~2023

우리나라도 혁신을 위해 혁신행정담당관이나 ‘정부혁신 어벤져스’ 같은 여러 장치를 운영해 왔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평가와 관리, 통제를 잘하는 조직 안에서 다시 혁신까지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리와 통제에 강한 사람에게 갑자기 “없던 것을 생각해 보라”, “남들이 하지 않던 것을 시도해 보라”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역량입니다.
그래서 정부 조직 안에서도 혁신적 시도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조직을 따로 두거나, 그런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뽑고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나라가 정부 안에 디자인·혁신조직을 두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3. 공공부문 디자인의 세 단계

공공영역에서 디자인의 역할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상위 단계인 정책디자인입니다. 정책과 조직의 방향, 의사결정 방식, 정부가 일하는 방식 자체를 디자인하는 영역입니다. 앞서 소개한 영국 Policy Lab 같은 조직이 여기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는 공공서비스디자인입니다. 국민이 실제로 경험하는 공공서비스를 수요자 중심으로 만들고 개선하는 영역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가장 익숙한 공공디자인입니다. 환경, 시설물, 공간, 시각정보 등을 다루는 영역입니다.
공공부문에서 디자인은 위 단계로 올라갈수록 더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직과 제도도 이런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선 사람들이 ‘정책에서 디자인을 활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활용했을 때 큰 변화가 생긴다는 경험도 필요합니다.

 

14. 국민디자인단: 정책 기획 단계에 서비스디자인을 넣다

한국에서는 2014년부터 행정안전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이 함께 정책 영역에 서비스디자인을 적용하는 ‘국민디자인단’을 시작했습니다. 행정안전부와 산업통상부 산하 기관이 장기간 협업한 것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약 12년간 운영됐고, 지난해까지 사업이 이어졌지만 올해는 예산이 없어 종료된 상태입니다.

그 사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강남구의 ‘같이 운동할래?’라는 프로그램입니다.
* 2023 국민정책디자인 우수사례 (대통령상)  사회와 장애인의 건강 동행 솔루션 - "가치 운동할래?" - 서울특별시 강남구

기존에는 장애인 재활을 위해 비싼 특수운동기구를 구매하고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수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장비를 늘려도 실제 이용률은 높지 않았습니다. 접근성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디자인단은 “어떻게 하면 정책 대상자가 실제로 운동을 더 잘 이용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방향은 ‘비싼 기구를 더 사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지역 주민과 함께 일상적인 공간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원에서 함께 운동하는 프로그램도 만들고, 지역 피트니스센터와 연계하는 방식으로 확장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장애인을 위해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동네 주민들도 관심을 갖고 함께 참여하게 됐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같이 운동하는 프로그램이 된 것입니다.
또 사용자 조사를 하면서 장애인이 일반 피트니스센터를 이용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발견했습니다. 보호자와 동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면 이용비용이 사실상 두 배가 됩니다. 강남구는 조례와 운영방식을 조정해 협력하는 피트니스센터에서는 장애인 이용 시 동행 보호자에게 별도의 이용료를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강제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참여를 원하는 센터와 협의해 운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례는 대통령상을 받았고, 담당 공무원에게도 좋은 성과로 이어졌으며, 특별교부세 등 후속 재원 확보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민디자인단은 운영 기간 동안 약 2천 개에 가까운 과제를 수행했고, 참여자도 약 2만 명 규모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런 시도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행적으로 공급자가 계획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에 나가 실제 수요자를 만나고 그들이 무엇을 겪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기존 정책개발 과정에도 수요자 의견을 듣는 절차는 있었습니다. 간담회, 공청회, 설문조사, 인터뷰 등을 계속 해왔습니다. 문제는 그런 방법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5. 간담회·공청회·설문·인터뷰의 공통 한계

간담회, 공청회, 설문조사, 인터뷰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대부분 말과 글로 표현되는 것만 수집한다는 점입니다. 물어보고 답을 듣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비스디자인에서는 관찰 같은 방법을 중요하게 사용합니다.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접근을 차용하는 것입니다.

 

16. 제안 1: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을 다시 디자인하자

제가 앞으로 공공정책이 이렇게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을 다시 디자인하는 것입니다.
* 관련 글 : 정책도 디자인이 필요하다 – 기본값을 다시 설정하라  

『넛지』를 아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결국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공공서비스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기본값이 아주 많습니다. 그 기본값은 대부분 공무원이 정합니다. 국민은 그 선택구조 안에서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별 장기기증 동의율을 비교한 유명한 자료가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매우 높고 어떤 나라는 매우 낮습니다. 국민성이 갑자기 그렇게 다르기 때문일까요?
운전면허 신청서에서 장기기증 의사를 물을 때 “기증하려면 체크하세요”라고 하는지, 아니면 “기증하지 않으려면 체크하세요”라고 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적용되는 기본값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무서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본값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정부가 국민에게 더 이로운 방향의 기본값을 정교하게 디자인할 수 있는 큰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기본값을 바꾸면 국민의 행동과 사회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17. 신호등 위치만 바꿔도 행동이 달라진다

광화문 앞 도로를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지선이 있고, 신호등은 그보다 훨씬 앞쪽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거리 맞은편에도 신호등이 한 세트 더 있습니다. 그래서 운전자는 정지선을 조금 넘어가도 여전히 신호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한 사람은 더 앞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기본값입니다.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게 하려면 단순히 교육하고 단속하는 것 외에도 환경 자체를 다르게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영국 런던은 CCTV와 규제를 강하게 활용합니다. 상당한 비용이 들고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지만, 기술과 규제로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독일은 더 단순한 방법을 씁니다. 정지선 가까이에 신호등을 두고 앞쪽에는 별도의 신호등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넘어 너무 앞으로 가면 신호등이 머리 뒤로 넘어가 출발 신호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정지선을 지키는 것이 가장 편한 행동이 됩니다. 사람을 잘 이해한 환경디자인입니다.

교통법규 준수나 교통사고를 국민성의 문제로만 보면 개선이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시스템 자체를 봐야 합니다. 잘못된 시스템을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모든 국민이 오랜 기간 그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시스템을 다시 디자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정부가 이런 기본값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점검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건강검진도 자동예약이나 자동안내 같은 방식을 활용하면 참여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맡고 계신 업무에도 기본값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많을 겁니다. 업무로 돌아가셔서 “우리 업무에서 어떤 기본값을 바꿀 수 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국민에게 더 이로운 방향이어야 할 것입니다.

 

18. 장애인의 금융서비스 이용: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

국민디자인단 과제 중에는 장애인의 금융서비스 이용에 관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 2017 국민디자인단 우수사례(우수상, 행정안전부 장관상)  장애인과 함께하는 금융 발걸음 - 금융위원회

과거 금융권에서는 장애인이 금융서비스를 잘 이용하지 않는 것을 두고 “적응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는 환경이 문제였습니다. 은행 건물에 들어가기 어렵고, ATM도 휠체어 사용자가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휠체어가 기기 아래로 충분히 들어가지 않으면 상단이나 안쪽 버튼에 손이 닿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실제 사용자를 만나고 관찰해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은 이미 매번 그 불편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그 불편을 경험하지 않으니 모릅니다.
결국 아주 사소한 선택 하나를 바꾸면 해결될 문제인데도 오랫동안 방치됩니다.
지자체는 조례를 조금 바꾸거나 운영기준을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중앙정부와 다른 방식의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분야별로 100개씩만 이런 기본값을 찾아 고친다면 세상은 꽤 살만해질 겁니다.

 

19. 제안 2: 정책랩을 만들고 정책을 실험하자

두 번째 제안은 정책랩입니다.
왜 이름이 ‘Lab’일까요? 실험실이기 때문입니다. 정책도 실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실제로 고위공무원에게 “국민을 상대로 실험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실험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제품 하나를 개발할 때도 R&D를 하고, 여러 번 테스트하고, 망가뜨려 보고, 여러 사람이 사용해 봅니다. 그런데 훨씬 더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실험 없이 바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책 기획 단계에는 실험을 위한 예산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서 중심으로 기획이 진행되고, 사용자를 만난다고 해도 실제 사용자를 직접 만나기보다는 그들을 대표하는 단체장이나 전문가를 만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국민디자인단을 운영하면서 많은 공무원을 만났는데, 실제 정책수요자를 현장에서 직접 만나 본 경험이 많지 않은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만나고 나면 달라집니다. 사용자가 실제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뀝니다.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도 더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정책개발 과정에는 수요자와 직접 만나는 접점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기초지자체에도 이런 정책랩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지자체장이나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혁신조직이 힘을 가지려면 여러 부서에 협력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서 간 칸막이를 넘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국적으로 이런 기능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을 체계적으로 육성한다면 상당한 규모의 정책혁신 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20. 제안 3: 난제 해결을 위한 디자인 프로젝트

세 번째는 난제 해결 디자인 프로젝트입니다.

행정부의 한 부서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고령화, 지역소멸, 재난, 안전, 돌봄 같은 주제는 특정 부서 하나에 맡겨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는 여러 이해관계자를 연결하고, 수요자 관점에서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작은 실험을 반복하면서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욕구 단계로 생각해 보면 가장 기본적인 안전, 회복력, 안심 같은 주제가 있고, 그다음에는 접근성과 사용성처럼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문턱을 낮추는 문제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계발이나 문화와 같은 삶의 질에 관한 주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주제 역시 디자인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디자이너는 사용자를 만나 문제를 발견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의 시각을 연결하고, 문제를 시각화하고, 새로운 대안을 빠르게 만들어 시험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21. 재난정보와 대피소도 디자인의 대상이다

재난정보를 보겠습니다. 국민재난안전포털에 들어가면 산불이나 홍수 같은 재난 상황이 주로 텍스트 중심으로 제공됩니다. ‘진화 중’, ‘진화 완료’ 같은 정보를 글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다른 나라의 재난방송을 보면 지도와 색, 도식 등을 활용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정보디자인의 역할입니다.

공무원이 빠르게 의사결정해야 하는 업무일수록 정보가 시각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 당시 진도실내체육관의 대피 공간 사진을 보면, 시간이 지난 뒤에도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거의 보장되지 않는 형태가 유지됐습니다. 최근 국내 산불 당시 임시대피소를 보아도 비슷한 문제가 반복됩니다. 일본은 지진과 재난이 잦기 때문에 대응체계가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반 시게루(Shigeru Ban)는 종이관과 천을 이용해 체육관 안에 빠르게 개인 공간을 만드는 파티션 시스템을 제안하고 실제 재난 현장에 적용해 왔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미리 준비해 두면 어떤 체육관이 대피소가 되더라도 빠르게 조달하고 설치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복사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상황에 맞는 대피소 시스템을 미리 개발하고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을 다시 설정하는 일도 수요자 중심 접근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22. 말과 글을 넘어 사용자를 관찰해야 한다

처음에 말씀드린 Bain & Company의 80%와 8% 차이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사실상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상징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급자가 수요자의 의견을 듣겠다고 단순히 “무엇이 필요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과 글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사용자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같이 무언가를 만들어 보거나, 공동워크숍을 해보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은 오래전부터 이런 방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연구대상과 언어가 잘 통하지 않더라도 함께 생활하면서 행동을 관찰하고,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과 일상 속 선택을 기록합니다. 그렇게 해서 말로 설명되지 않는 욕구를 찾아냅니다.
서비스디자인도 이런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전제는 단순합니다. 공급자와 수요자의 생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말로 듣는 것만으로는 실제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공공정책에도 이런 사용자 관찰 방법이 더 많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23. 어린이 칫솔: 관찰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것

마지막으로 사례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이 칫솔을 떠올려 보십시오. 손잡이는 통통하고 부드러운 재질이고, 입 안에 들어가는 칫솔머리는 작습니다.
이 형태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1996년 이전에는 어린이 칫솔이 단순히 어른 칫솔의 작은 버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996년 Oral-B가 디자인기업 IDEO에 어린이 칫솔 디자인을 의뢰했습니다. IDEO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들이 실제로 이를 닦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디자이너도 어릴 때 칫솔질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굳이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관찰해 보니 아이들은 어른처럼 손가락으로 칫솔을 정교하게 잡지 못하고 주먹으로 꽉 쥐듯이 잡았습니다. 손과 손가락의 근육과 미세운동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잡이가 가늘면 자꾸 빠져나가고 조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손잡이를 더 굵고 부드럽게 만들고, 입 안에 들어가는 부분은 작게 만든 형태가 나왔습니다. 이후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어린이 칫솔의 전형이 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아이에게 “어떤 칫솔을 원하니?”라고 물어봐서 그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관찰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자 관찰이 중요합니다.

 

24. 마무리

마지막 질문 드립니다. 아까와 같은 질문입니다. 

Q3. 디자인이 기여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⑤+ ④ = 90.7%  (강의 전 67.8%)
⑤ 조직·제도·정책 시스템의 작동 방식까지 개선하는 것       61.1.%  
④ 사용자를 이해해 정책·사업의 문제를 찾 고 기획하는 것   29.6%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디자인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남은 시간은 질문을 받고, 여러분이 현업에서 디자인과 관련해 경험하신 사례가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