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이 있는데 왜 문을 못 열까?

2026. 9. 6. 10:42디자인/디자인·예술이야기

좋은 인터페이스는 기억하게 하지 않는다

어머니 댁에 갔는데 건물 출입구 문을 열어주지 않으신다. 집에 계시는데 왜 그러시지?
마침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인터폰 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 하신다. ‘문열림’ 버튼은 가끔만 쓰니 위치를 외우고 있지 않다. 아무 버튼이나 눌러볼 수도 없다. 안경을 찾아 쓰고 보면 방문자는 꽤 기다린 뒤다.
아래 사진처럼 시력이 떨어져서 버튼은 보이지만 그 위의 작은 글씨는 읽히지 않는다.

돋보기 없이 인터폰을 보는 어머니의 시야 재현
문열림 버튼에 노란 표시를 붙인 인터폰


‘문열림’ 버튼 아래에 노란 표시 하나를 붙였다. 이제 문열림 버튼을 바로 찾으신다.
하지만 해결된 것은 문을 여는 한 가지 기능뿐, 인터폰의 사용성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경비실 호출, 통화, 외출, 비상 같은 다른 기능은 여전히 작은 글씨를 읽거나 버튼의 위치를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도 사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노란 표시는 해결책이라기보다 이 인터페이스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에 가깝다.
처음에는 이 인터폰 만의 문제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인터폰과 월패드를 찾아보니 다 비슷했다. 기능이 다른 버튼을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배열하고, 작은 글씨나 아이콘으로 차이를 구분한다.
터치스크린으로 조작하는 제품도 표현 방식만 달라졌을 뿐 비슷한 문제가 남아 있다. 시력이 좋고 제품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시력이 떨어지거나 가끔 사용하는 사람에게 각 기능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업이 된다.

여러 인터폰·월패드의 인터페이스 유형 비교. 실제 제품 유형을 참고해 공통적인 인터페이스 특징을 재구성한 이미지(AI)


이 문제를 설명하는 오래된 사용성 원칙이 있다.
제이콥 닐슨(Jakob Nielsen)의 사용성 휴리스틱 중 하나인 ‘회상보다 재인(Recognition rather than Recall)’이다. 사용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억하게 하지 말고,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돈 노먼(Don Norman)은 시그니파이어(Signifier)라는 개념으로 비슷한 문제를 설명한다. 기능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디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가 보여야 한다.
어머니에게 노란 표시는 바로 그 단서였다. 특히 가끔 사용하는 제품은 기억에 의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기능이라면 작은 글씨를 읽지 않아도 위치, 크기, 형태, 색, 아이콘 등의 차이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기능이 있다는 것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좋은 인터페이스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음 행동이 보인다.


2026.9.6. 윤성원

-----
‘회상보다 재인’과 ‘시그니파이어’

재인은 기억을 꺼내지 않고도 보고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 시그니파이어는 어디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각 가능한 단서다.
회상보다 재인(Recognition rather than Recall)은 제이콥 닐슨(Jakob Nielsen)의 사용성 휴리스틱 원칙* 중 하나다. 사용자가 기능의 위치나 사용법을 기억해내게 하기보다, 필요한 정보와 선택지를 보고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인터폰에서 ‘문열림은 두 번째 버튼’이라고 기억해야 한다면 회상에 의존하는 인터페이스다.

* 제이콥 닐슨(Jakob Nielsen)의 10가지 사용성 휴리스틱
1. 시스템 상태의 가시성 —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준다.
2. 시스템과 현실 세계의 일치 — 사용자가 익숙한 언어와 개념을 사용한다.
3. 사용자 통제와 자유 — 취소·되돌리기가 가능해야 한다.
4. 일관성과 표준 — 같은 의미는 같은 방식으로 표현한다.
5. 오류 예방 — 실수한 뒤 경고하기보다 실수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6. 회상보다 재인 — 기억하게 하지 말고 보고 알아볼 수 있게 한다.
7. 사용의 유연성과 효율성 — 초보자와 숙련자 모두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8. 미니멀한 디자인 — 불필요한 정보를 줄인다.
9. 오류의 인식·진단·복구 지원 — 오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0. 도움말과 문서 — 필요할 때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출처: Jakob Nielsen, “10 Usability Heuristics for User Interface Design,” Nielsen Norman Group, 1994

시그니파이어(Signifier)는 돈 노먼(Don Norman)이 강조한 개념으로, 사용자가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 어디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각 가능한 단서다. 버튼의 형태, 색, 위치, 아이콘, 화살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진에서 붙인 노란 표시는 ‘이 버튼을 누르라’고 알려주는 시그니파이어다.
둘의 초점은 다르다. 닐슨의 원칙은 사용자의 기억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두고, 노먼의 시그니파이어는 행동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하는 단서에 초점을 둔다. 
예를 들어 ‘문열림은 두 번째 버튼’이라고 외워야 한다면 회상이다. 문열림 버튼이 다른 버튼과 쉽게 구별되어 보고 찾을 수 있다면 재인이 가능하다. 이때 그 구별을 만들어주는 색, 형태, 아이콘 같은 단서가 시그니파이어가 될 수 있다.
재인은 인지의 방식이고, 시그니파이어는 행동을 알려주는 디자인 단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