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14. 00:08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정책디자인의 시대로의 전환과 과제
2026 한국정책학회 하계학술대회 정책디자인연구회 세션
2026.8.13.(목) 13:00~14:20 (80분)
장소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B2 학습연구실 (12분과)
사회 | 배유일 동아대학교 교수
1. 싱가폴 정부 내 정책디자이너의 연결적 행위주체성에 대하여 - 김아미 성균관대학교 국정평가연구소 박사후연구원
2. 공공서비스디자인을 넘어 정책디자인으로: 세종시 사례 - 김세은 전 세종시 공공서비스디자이너
3. 정책디자인의 역할과 과제 - 윤성원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장
토론자
이승호 UNIST 교수
여소연 헬스케어서비스디자인 연구자
김선희 육군3사관학교 교수
정책디자인의 현재와 다음 과제
2026년 8월 13일 한국정책학회 정책디자인연구회에서는 정책디자인이 정부 안에서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를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정부의 일하는 방식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논의했다. 발표자는 김아미 박사, 김세은 정책디자이너, 윤성원 한국디자인진흥원 실장이었다. 김아미 박사는 싱가포르 정부 안에서 활동하는 정책디자이너를 연구자의 관점에서 분석했고, 김세은은 세종시에서 5년간 서비스디자이너로 일하며 실제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한 경험을 소개했다. 윤성원은 최근 10여 년 공공서비스디자인을 정부와 공공부문에 확산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디자인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구조적 조건을 제안했다.
발표 뒤에는 배유일, 이승호, 김선희, 여소연 등이 참여해 순환보직, 조직의 사일로, 공무원 평가와 경력체계, 시민참여의 형식화, 공공디자인 인력과 법체계까지 논의를 확장했다.
정책디자이너는 누구인가 — 방법을 쓰는 사람에서 ‘연결하는 사람’으로
첫 번째 발표에서 김아미 박사는 이정주 교수와 공동으로 진행한 ‘싱가포르 정부 내 정책디자이너의 연결적 행위주체성’ 연구를 소개했다. 세계 여러 정부에서 서비스디자이너, 콘텐츠디자이너, UX디자이너, 정책디자이너 등 새로운 전문인력이 등장하고 있지만, 정책디자이너가 정확히 누구이며 기존의 정책가나 서비스디자이너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합의가 없다. 연구팀은 디자인 접근을 정책과 서비스 문제에 활용하는 싱가포르 정부의 중견·고위급 실무자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채용공고와 정부 자료를 분석하면서 정책디자이너라는 역할이 실제 조직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봤다.
연구에서 특히 흥미로운 구분은 다운스트림 디자이너와 업스트림 디자이너이다. 다운스트림 디자이너는 정책이 이미 결정된 뒤 그것을 구현하는 단계에서 일한다. 예를 들어 어느 부처가 정책 방향을 정한 뒤 웹사이트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사용하기 좋은 웹사이트를 만드는 역할이다. 반면 업스트림 디자이너는 그 웹사이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한 시민의 경험과 문제를 다시 정책 담당자에게 전달한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 끝나지 않고 “애초에 우리가 만들려는 정책이 시민의 현실에 맞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역할도 확대된다. 어떤 디자이너는 사용자조사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권고하는 데 그치지만, 어떤 디자이너는 정책 담당자와 함께 정책을 수정하고 공동디자인하며, 더 시니어한 수준에서는 정책 형성에서 실행까지 전 과정에 관여하면서 디자인뿐 아니라 데이터, AI, 시스템 사고, 시나리오 플래닝 등 다양한 혁신 접근을 결합해 정책 과정 자체를 바꾸려 한다.
김아미 연구에서 정책디자이너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은 ‘연결적 행위주체성(relational agency)’이다. 정책디자이너는 디자인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책과 시민을 연결하고, 정책 형성과 실행을 연결하며, 서로 다른 조직과 전문영역 사이를 오가는 역할을 한다. 정책가와 디자이너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전문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디자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 정책 과정에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디자인의 언어만이 아니라 정책과 행정의 언어와 업무방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연구 참여자들의 인식도 중요하다. 정책디자이너의 전문성이 디자인 분야 내부의 전문성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연구는 한국의 정책디자인을 다시 보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준다. 지금까지 정책디자이너의 역량을 말할 때는 사용자조사, 서비스디자인 방법, 워크숍 운영 같은 방법론적 능력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실제 정부에서 정책디자이너가 필요한 이유는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 문제가 기존 부서의 경계를 넘어갔을 때 다음 부서와 다음 정책단계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시민의 문제는 행정조직의 업무분장처럼 깔끔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복지의 문제를 조사하다 보면 교육과 건강의 문제를 만나고, 안전문제를 조사하다 보면 노동환경과 조직문화의 문제로 넘어간다. 따라서 정책디자인이 정책의 앞단으로 갈수록 디자인 방법만큼이나 연결할 수 있는 위치와 관계, 조직적 권한이 중요해진다.
싱가포르 GovTech의 forward deployment는 이런 조건을 조직 차원에서 만드는 사례이다. 다른 부처가 결과물을 요청했을 때 GovTech가 결과만 제작해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필요하면 담당 직원을 몇 개월 또는 몇 년 동안 해당 부처에 배치해 함께 일하도록 한다. 그 사람이 정책조직의 업무와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정책의 앞단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뛰어난 개인 한 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정책디자이너가 업스트림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조직이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정책디자이너를 제도화한다는 것은 따라서 직함을 만드는 일보다 훨씬 넓다. 어떤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지, 누구와 함께 일할 수 있는지, 어느 수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경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 자세히 보기 : 주제 1. 싱가폴 정부 내 정책디자이너의 연결적 행위주체성(relational agency)에 대하여 - 김아미 성균관대학교 국정평가연구소 박사후연구원
실제 행정에서 정책디자인은 무엇을 바꾸는가 — 세종시 5년의 경험
두 번째 발표는 김세은 정책디자이너의 세종시 경험이었다. 김세은은 세종시 기획조정실 산하 혁신 관련 부서에서 5년 동안 서비스디자이너로 일하며 정책 기획과 개발, 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자신을 ‘서비스디자이너’보다 ‘정책을 만드는 정책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 공공조직에서 서비스디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여전히 시각디자인이나 웹디자인을 떠올려 포스터나 웹사이트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가 수행한 일은 이미 정해진 정책의 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민을 조사하고 정책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었다.
김세은은 지방정부에서 정책이 만들어지는 현실적인 과정을 설명했다. 중앙정부가 새로운 사업을 내려보내거나 시장의 공약사업이 생기면 담당자는 짧은 시간 안에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때 흔히 등장하는 질문이 “다른 지자체는 어떻게 하고 있지?”이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규모가 비슷하거나 가까운 지자체에 문의한 뒤 이미 시행 중인 사례 가운데 괜찮아 보이는 것을 참고해 정책을 만든다. 그러나 지역마다 인구구조, 연령비율, 지리와 문화, 주민의 생활방식과 재정여건은 다르다. 세종시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온 젊은 도시이며 신도심과 읍면지역의 차이, 높은 청소년 비중, 정부기관 종사자가 많은 특성, 광역자치단체이면서 기초자치단체 기능까지 함께 수행하는 단층제 구조 등 다른 도시와 구별되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김세은이 정책디자인의 최종적인 역할 가운데 하나를 ‘지역 맞춤화’라고 본 이유다. 중앙정부나 다른 지자체에서 만들어진 정책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이 지역과 이 시민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동학대 과제는 정책디자인이 문제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인이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아동학대 신고와 대응체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처음에는 세종시 역시 신고체계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봤다. 그러나 현장의 자료와 경험을 조사하면서 세종시에서는 청소년의 자가신고 비중이 높다는 특징을 발견했다. 더 깊이 들어가자 부모의 높은 교육 기대, 청소년의 스트레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이 중요한 문제로 드러났다. 처음의 질문은 ‘아동학대 신고를 어떻게 더 잘 받을 것인가’였지만 조사 이후에는 ‘청소년과 부모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로 달라졌다. 문제를 다시 정의하자 필요한 정책도 신고시스템 개선에서 부모교육, 청소년 상담, 관계회복 등으로 이동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동학대 담당부서는 청소년 관련 정책은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고 했고, 청소년 담당부서는 자신들이 시작한 사업이 아니므로 갑자기 맡기 어렵다고 했다. 정책디자인은 더 적절한 문제를 발견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업무분장을 넘어서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시민의 삶에서는 하나의 문제인데 행정에서는 여러 부서의 문제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중년 정책도 비슷했다. 전국의 많은 신중년 정책이 은퇴 후 재취업과 창업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실제 세종시의 신중년을 만나보니 다른 요구가 나타났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은퇴를 준비한 사람들이 많았고, 또 다른 일자리보다 가족과 직장을 위해 포기했던 취미나 꿈을 다시 찾고 또래와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컸다. 따라서 시민 관점에서 보면 신중년 정책의 중심은 취업만이 아니라 삶의 전환, 관계, 자아실현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정책을 담당한 조직은 일자리 관련 부서였다. 역시 시민이 가진 문제와 행정조직이 정의한 업무영역 사이의 불일치가 나타났다.
도시농업과 한우 과제에서도 정책디자인은 처음 주어진 문제와 다른 답을 찾았다. 세종시의 도시농업은 단순히 농업활동이 아니라 새롭게 이주한 주민들이 외로움을 해소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활동한 도시농부 가운데는 상당한 경험과 생산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신중년 프로그램의 강사로 연결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났다. 한우 과제에서는 새로운 지역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처음의 목표였지만, 조사해 보니 이미 세종지역 한우가 지역에서 판매되고 있고 시민들은 그것이 세종산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새 브랜드를 만드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지역자원을 시민에게 알리고 지역에서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더 적절한 문제해결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 네 사례가 보여주는 정책디자인의 핵심은 분명하다. 정책디자인은 주어진 문제에 더 좋은 해결책을 붙이는 일이 아니라, 정부가 처음 정의한 문제가 정말 맞는지를 다시 묻는 과정이다. 기존 정책의 전제부터 다시 보기 때문에 불필요한 사업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담당부서를 바꿔야 할 수도 있으며, 서로 관계없어 보이던 정책을 연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강점이 행정조직에서는 어려움이 된다. 문제를 시민 관점에서 깊이 이해할수록 하나의 부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견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김세은의 발표에서 정책디자인 조직이 기관장이나 기획·조정 기능에 가까워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다. 6급 임기제 전문가 한 명이 여러 부서를 설득하고 업무경계를 바꾸기는 어렵다.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도 실제 담당부서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행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직급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정책디자이너가 부서 사이를 연결하고 발견된 문제의 책임주체를 조정할 수 있는 위치와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아미 연구에서 나타난 ‘연결적 행위주체성’이 왜 조직적 조건과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지를 김세은의 경험이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 자세히 보기 : 주제 2. 공공서비스디자인을 넘어 정책디자인으로: 세종시 사례 - 김세은 전 세종시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정책디자인이 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세 번째 발표에서 윤성원 한국디자인진흥원 실장은 공공서비스디자인과 정책디자인을 오랫동안 확산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디자인이 일회성 사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구조적 조건을 시간, 사람, 제도의 세 가지 문제로 정리했다. 문제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국민디자인단을 포함해 상당한 수의 정책디자인 실험과 좋은 사례가 만들어졌고 방법도 축적됐는데, 왜 여전히 정책디자인은 정부의 일반적인 일하는 방식이라고 보기 어려운가라는 질문이다. 윤성원은 그 이유를 새로운 방법론의 부족보다는 이를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정부의 구조에서 찾았다.
첫째는 시간의 문제다. 정책은 문제를 이해하고 기획하고, 예산을 확보하고, 실행한 뒤 결과를 확인해 다시 개선하기까지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 반면 공무원은 한 직위에 머무르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새 업무를 맡으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전년도 계획을 집행하면서 동시에 다음 연도 예산과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 업무를 충분히 경험하기 전에 다음 사업을 결정해야 하고, 한두 해가 지나 비로소 개선할 문제를 알게 되면 이미 예산과 계획은 정해져 있거나 자신이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전임자가 기획한 정책을 내가 집행하고, 내가 기획한 정책은 다음 담당자가 집행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정부는 계속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도 경험으로부터 충분히 학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토론에서는 순환보직이 갖는 행정적 이유도 함께 지적됐다. 여러 업무를 경험하는 것은 관리자를 키우는 데 필요하고, 특정 업무를 지나치게 오래 맡을 때 생길 수 있는 유착이나 권력 집중을 막는 기능도 있다. 따라서 해법은 제너럴리스트와 함께 전문직 경력경로를 함께 인정하는 것이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전문성을 키울수록 공무원이 승진과 평가에서 손해를 보는 구조라면 전문성은 갖추어지기 어렵다.
둘째는 사람의 문제다. 한국은 공공서비스디자인을 정부에 도입하고 관련 사업과 자격제도를 만들었지만, 그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공공서비스디자이너의 직무와 경력경로를 안정적으로 제도화하지는 못했다. 2020년 전후 지방정부에서 공공서비스디자이너가 임기제 형태로 채용된 사례가 있었지만, 이들이 어느 조직에 배치됐는지에 따라 역할의 가능성이 크게 달라졌다. 기존의 도시·환경·시설물 중심 공공디자인 부서에 배치된 경우 정책과 서비스 영역을 넘나들며 일하기 어려웠고, 김세은처럼 기획·조정·혁신 기능과 가까운 곳에 배치된 경우 상대적으로 여러 정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최근 여러 지방정부에서 나타나는 총괄디자이너 또는 총괄 공공디자이너 제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 단계의 변화로 볼 수 있다. 기존에는 사업의 디자인안이 상당 부분 만들어진 다음 위원회가 심의했다면 총괄디자이너는 기획단계부터 기관장과 실무부서에 의견을 제시하고 여러 사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장기적으로는 외부 전문가 활용에서 총괄디자이너, 인하우스 전담 디자인팀으로 발전하고, 다시 여러 부서가 시민을 이해하고 문제를 재정의하고 실험하는 방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조직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제도와 디자인의 정의 문제다. 한국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소관의 「산업디자인진흥법」과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있다. 1977년 「디자인·포장진흥법」에서 시작한 산업디자인 관련 법체계는 시대에 따라 영역을 넓혀 제품·시각·환경뿐 아니라 서비스디자인까지 포함하게 됐다. 반면 공공디자인법에서 공공디자인은 여전히 공공시설물, 용품, 시각 이미지 등 물리적인 공공환경 중심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민간 산업을 주로 지원해 온 산업디자인 법체계에는 서비스디자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정작 ‘공공디자인’을 다루는 제도에서는 공공서비스와 정책이 핵심적인 디자인 대상으로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하는 역설이 생긴다.
윤성원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영국 정부의 Public Design Evidence Review(PDER)를 한 사례로 제시했다. PDER는 영국 공공부문에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과 가치를 가지는지를 검토하는 범정부 연구로, 영국 정부는 서비스디자인이나 정책디자인 등 다양한 디자인 활동을 Public Design이라는 넓은 틀에서 함께 살펴보고 있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디자인의 대상이 이미 시설과 결과물에서 서비스와 정책으로 확장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공공부문에서 디자인이 어디까지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기관은 시설과 환경디자인에 집중하고 있고, 어떤 곳은 총괄디자이너를 통해 여러 부서와 사업을 조정하며, 또 어떤 조직은 서비스와 디지털 경험까지 다룬다. 정책과 조직 자체를 디자인의 대상으로 다루는 기관도 생길 수도 있다. 이러한 차이를 조사해 공공부문의 디자인 활용 지형과 역량 수준을 파악하고, 각 기관이 다음 단계로 발전할 경로를 만드는 것이 법체계를 다시 논의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다.
> 자세히 보기 : 주제 3. 정책디자인의 역할과 과제 - 윤성원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장
토론에서 더 선명해진 문제 — 사일로, 경력, 참여, 권한
발표 이후 토론에서는 세 발표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행정학과 정책학의 관점에서 더 확장됐다. 배유일 교수는 순환보직의 부작용에 공감하면서도 우리 공직제도가 계급제와 제너럴리스트 중심으로 발전해 온 역사적 배경, 그리고 장기보직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유착이나 권력집중 문제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과거 부산의 리빙랩 사례 연구를 소개하면서 시민참여 기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시민 중심 정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리빙랩이 본래 시민의 경험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방법이어도 실제 운영에서는 이미 만들어진 정책에 시민의 동의를 얻는 절차로 축소될 수 있다. 참여의 형식보다 시민의 의견이 실제 정책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가가 중요하다는 문제다.
김선희는 탑다운 방식의 제도화가 효과적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최고 의사결정자의 관심만을 기다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짚었다. 모든 정책영역에서 서비스디자인의 필요성이 동일한 것도 아니므로 시민과 직접 접촉하는 복지나 생활서비스처럼 디자인의 효과를 체감하기 쉬운 영역에서부터 성과를 만들어 확산하는 바텀업 접근도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동시에 이런 새로운 시도가 현장 공무원에게는 기존 업무에 추가되는 ‘플러스 업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평가와 보상체계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결국 정책디자인을 확대하는 일은 디자인 방법을 추가하는 것을 넘어 공무원의 업무와 평가, 경력체계까지 연결되는 행정혁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소연은 국민디자인단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했던 경험을 통해 사일로와 지속성의 문제를 강조했다. 워크숍에서 시민과 전문가가 많은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실제 담당조직과 실행체계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몇 달 뒤 결과보고서만 남는다. 시민들은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자리를 반기지만, 몇 년이 걸릴 문제를 몇 개월짜리 프로젝트로 다루고 그 이후의 실행 주체가 없다면 참여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수 있다. 또한 역할은 있지만 권한이 없고, 부서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책임과 권한은 부서경계에 묶여 있는 실무자의 현실도 지적했다. 이는 김아미가 이야기한 연결적 행위주체성이 실제 행정에서 작동하려면 개인의 태도뿐 아니라 연결할 권한과 조직적 경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이승호는 다른 각도에서 기존 공공디자인 인력과 예산의 활용방식을 문제로 제기했다. 지방정부에는 이미 상당한 디자인 관련 인력이 있고 시설물, 버스정류장, 간판, 지역 색채와 같은 디자인사업에도 많은 예산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유사한 시설과 기준을 지자체마다 반복해서 개발하고, 디자이너가 개별 부서 안에서 들어오는 업무를 처리하는 데 집중하는 구조라면 공공부문의 전체적인 디자인역량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새로운 정책디자이너를 무조건 추가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디자인 인력과 자원을 더 넓은 서비스와 정책 문제로 이동시킬 수 있는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공공디자인의 범위와 조직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논의와도 연결된다.
토론에서는 큰 제도변화만큼 작은 행정혁신도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현장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검지점에 QR코드를 두고 담당자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게 한 사례처럼, 매우 단순한 변화만으로도 정책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작은 실험을 통해 정책디자인의 효과와 역할을 인식시킬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실험을 많이 만드는 것과 그 경험이 사라지지 않도록 조직과 제도를 바꾸는 것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과제다.
정책디자인의 다음 단계 — 프로젝트에서 정부의 역량으로
이번 연구회에서 흥미로운 점은 세 발표자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했음에도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아미의 연구는 정책디자인을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 결과 정책디자이너는 디자인 방법론의 전문가라기보다 정책과 시민, 정책 형성과 실행, 서로 다른 조직과 전문영역을 연결하는 하이브리드 전문가로 나타났다. 김세은의 경험은 정책디자인을 실제 행정에 적용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보여줬다. 시민의 경험을 조사하면 정부가 처음 정의한 문제와 다른 문제가 발견되고, 그에 따라 정책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었다. 동시에 문제를 더 정확하게 정의할수록 기존 부서의 업무경계를 넘어가 실행이 어려워지는 역설도 확인됐다. 윤성원의 발표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러한 활동이 개인의 시도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정부의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를 시간, 사람, 제도의 문제로 제시했다.
세 발표와 토론을 함께 놓고 보면, 정책디자인이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인 방법을 적용하는 단계에서 지속적인 정부 역량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담당할 전문직이 필요하고, 이들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직과 권한이 필요하며, 다시 그 경험이 일부 전문가에게만 머물지 않고 여러 부서의 문제해결 역량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결국 정책디자인의 발전은 프로젝트로서의 정책디자인에서 전문직으로서의 정책디자인으로, 다시 조직의 역량과 정부의 역량으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정책디자인이 축적해 온 경험은 결코 작지 않다. 국민디자인단과 공공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을 조사하고 정책의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방법은 상당한 기간 동안 실천되어 왔고, 여러 지역과 기관에서는 총괄디자이너와 혁신조직 등 새로운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경험이 정부 안에 축적되고 다음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이번 연구회는 결국 ‘정책디자인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정부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다음 질문을 찾은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디자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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