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0. 1. 03:06ㆍ디자인/디자인·예술이야기

한 제조기업에 갔을 때였습니다. 현장 입구에 안전표지가 여러 장 붙어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작업 시 안전모 착용’, 다른 쪽에는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두 표지가 서로 바뀌어 붙어 있었습니다. 안전모를 써야 할 작업장에는 출입금지가 붙어 있고, 출입하면 안 되는 곳에는 안전모를 쓰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몇 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무도 그 표지를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장 작업자 10명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사장님은 새로운 안전표지가 나오면 출력해서 붙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업자들은 보지 않습니다. 하청업체인 이 기업에서는 원청 관계자가 방문했을 때 “그래도 안전관리를 하고 있구나”라고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안전조치를 하는 것으로 행동이 바뀌는지를 어떻게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장 윤성원입니다. 저희는 산업통상부 산하 기관이고, 2021년부터 산업안전디자인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산업안전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부의 산업안전 지원은 시설과 장비 개선에 상당한 비중을 두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클린사업장 사업입니다. 올해 5천3백억원의 예산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중소사업장의 유해·위험요인을 개선하기 위해 시설이나 장비 구입을 지원합니다.
이런 투자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산업재해가 시설과 장비의 결함 때문에 생기는 걸까?
그래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공개한 약 3,500건의 사고사례 가운데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약 1,600건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사고 하나에는 여러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지금 말씀드리는 비율은 서로 중복될 수 있습니다. 분석 결과, 사람과 시스템의 상호작용, 오조작이나 행동 오류와 관련된 요인이 포함된 사고가 약 95%였습니다. 이에 비해 시설이나 장비 결함이 원인으로 포함된 사고는 약 15%에 불과했습니다.
기계보다 사람이 문제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고의 95%는 사람이 잘못해서 생기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반복해서 실수한다면 왜 그런 실수를 하게 되는지를 봐야 합니다. 정보가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조작방식이 혼란스러워서 실수를 유발하고 있는 것인지, 작업동선이 위험한 것인지, 실제 작업방식과 절차가 맞지 않아서인지, 안전한 행동보다 위험한 행동이 더 쉬운 구조는 아닌지를 봐야 합니다. 산업재해는 사람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잘못된 작업환경, 설비, 정보, 업무절차, 관리체계에 맞물리면서 생기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부주의’나 ‘실수’라고 부르는 것 상당수는 사고의 최종 원인이라기보다, 그 이전에 존재한 시스템 문제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산업안전에 대한 투자도 재편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환경과 시스템의 상호작용에서 겪는 문제가 이렇게 큰데, 산업안전 투자는 왜 여전히 시설과 장비 개선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을까요?
위험한 기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투자하는 것과 함께, 사람이 그 기계와 안전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게 만드는 데도 투자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희가 산업안전디자인 사업을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디자인이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교통에서의 사례를 하나 보겠습니다.
독일의 교차로를 보면 신호등이 정지선 가까이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지나 너무 앞으로 나가면 신호등이 머리 뒤쪽에 놓여 다음 신호를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지선에 맞춰 차를 세우게 됩니다.
“정지선을 지키십시오”라고 안내 표지를 붙이거나 교육하는 대신, 환경 자체가 올바른 행동을 유도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안전디자인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에게 더 조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도로에서 운전하는 인간을 이해해야 안전한 도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작업장에서 일하는 인간을 이해해야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화기는 대부분의 작업장에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만 실제 화재가 발생하면 사람은 당황합니다.
그래서 소화기 위치를 멀리에서도 즉시 인지할 수 있도록, 평상시에도 늘 위치를 염두에 둘 수 있도록 크게 표시했습니다.
어떤 공장에서는 버려지는 칼날에 베이는 사고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사용한 칼날을 쉽게 버릴 수 있게 자석을 활용한 폐기함을 만들었더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칼날을 붙여두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화학물질 사고에서는 풍향을 확인하고 안전한 방향으로 대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존 풍향계는 위급한 순간에 어느 쪽으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달려가야 할 방향을 손가락 모양으로 직접 가리키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차량이 작업자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공정에서는 차량이 접근하면 LED가 점멸하여 위험을 알아차리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사람이 더 주의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행동하기 쉬운 조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안전디자인은 색깔을 바꾸고, 표지를 크게 만들고, 행동을 유도하는 것은 시작으로 하여 궁극적으로는 왜 위험한 행동이 반복되는지 이해하고 작업환경과 설비, 동선, 업무절차, 관리체계까지 다시 디자인해야 합니다.
행동을 유도하는 디자인에서 시작해서 시스템을 개선하는 디자인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려면 시간과 자원이 많이 필요합니다. “디자인하는 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이 듭니까?”라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은 결과물을 그리는 데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디자이너가 현장에 들어가 작업자를 관찰하고, 인터뷰하고, 함께 문제를 찾습니다. 저희 안전디자인 사업은 한 기업을 대상으로 약 6개월 동안 진행하고, 기업당 약 8천만 원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안전관리자가 생각하는 문제와 실제 작업자가 경험하는 문제가 같은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위험을 느끼고, 왜 위험을 무시하고, 왜 정해진 절차를 따르지 않는지를 찾아내는 데 자원이 들어갑니다.
디자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이 제대로 된 문제를 찾는 일입니다. 애당초 문제가 잘못 정의되었다면 그것을 아무리 잘 해결한다고 해도 현장은 안전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식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설과 장비에 대한 투자이상으로,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투자가 필요합니다. 기계를 교체하는 비용은 안전투자로 보면서,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디에서 실수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는지를 찾고,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 설계하는 '디자인' 비용을 뭔가를 이쁘게 꾸미기 위한 비용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수요자를 관찰하고 참여시키는 것은 디자인의 부가활동이 아니라 안전문제를 발견하기 위한 핵심적인 투자입니다.
그런데 개별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산업현장에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안전디자인 문제가 매우 많습니다. 업종도 다르고, 작업방식과 설비, 위험의 형태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개별 기업 지원과 별도로, 산업안전디자인에 어떤 기반 연구가 필요한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로드맵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13년 동안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범위를 정리해 보니 612개 영역이 도출됐습니다. 산업안전디자인이라는 분야가 그만큼 넓고, 아직 연구해야 할 주제가 많다는 뜻입니다. 현장에서 반복되는 문제를 연구하고, 검증된 해결방법을 축적해 앞으로 다른 기업과 업종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표준모델을 만들어가려는 것입니다.
저희는 이 과정에서 도면 분석이나 규정 검토처럼 반복 가능한 영역은 AI를 활용해 전문가의 판단을 보조하는 방법도 실험하고 있습니다. 다만 AI가 현장의 문제를 대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설비라도 누가, 어떤 작업방식과 조직문화 속에서 사용하는지에 따라 위험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조안전 R&D를 기획하는 단계부터 디자인 전문성을 가진 기업과 전문가가 함께 참여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도로에서 운전하는 인간을 이해해야 안전한 도로를 만들 수 있듯이, 산업안전도 작업장에서 일하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시작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떻게 일하고, 어디에서 망설이고, 무엇을 무시하며, 어떤 조건에서 위험한 행동이 발생하는지를 현장에서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런 조사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RFP를 만들기 전에 모든 현장을 깊이 조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제조안전 R&D에서는 먼저 기존 사고자료와 현장 관계자의 의견을 통해 반복되는 사고의 위험 시나리오부터 좁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제가 선정된 뒤에는 디자인 전문가와 안전관리자가 현장에 들어가 실제 작업자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문서에 정의된 작업조건과 실제 현장의 작업방식이 어디에서 어긋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 기술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아니라 ‘이 사고는 어떤 조건에서 왜 반복되는가?’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확인하기도 전에 기술을 먼저 정하는 것은 고장 원인을 찾기 전에 교체할 부품을 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를 충분히 정의한 다음에야 AI가 필요한지, 센서가 필요한지, 설비를 손봐야 하는지, 아니면 절차와 정보체계를 바꿔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해결책을 적용한 뒤에는 다시 현장에서 작업자의 행동이 의도한 방향으로 바뀌었는지 검증해야 합니다. 새로운 불편이나 우회행동, 예상하지 못한 위험이 생기지는 않았는지도 봐야 합니다.
엔지니어링에서 요구사항을 정의하고 구현한 뒤 검증하듯이, 안전디자인도 현장의 행동을 관찰해 문제를 정의하고, 적절한 수단을 적용한 뒤, 실제 행동 변화까지 검증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제조안전 R&D에 디자인 전문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감사합니다.
윤성원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장
2026.9.30. 제조안전얼라이언스 6차 회의에서 발표 원고를 바탕으로, 했어야 했던 이야기를 포함해서 AI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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