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앞단에 디자인이 참여해야 한다 - 윤성원

2026. 10. 28. 21:53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정책 앞단에 디자인이 참여해야 한다 
윤성원 |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장
2026.10.28. 경기주택도시공사에서의 강연 내용을 챗GPT가 요약함

공급자는 자신이 수요자 중심이라고 믿는다

수요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면, 듣는 이들 대부분이 이미 수요자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고 답한다. 경영 컨설팅 회사 베인앤컴퍼니가 2005년 362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가 있다. 자사가 뛰어난 고객 경험을 제공한다고 답한 기업은 80%였는데, 고객의 평가에서 뛰어난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난 기업은 8%에 그쳤다.[1] 그 간극은 매우 크다. 
진흥원은 행정안전부와 함께 12년 동안 국민디자인단을 운영했다. 2014년에 시작해 작년까지 이어진 이 사업은 정책 기획 단계에 국민이 참여하는 활동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책 기획과 관련된 정부 사업이 이만큼 오래 이어진 예는 드물다. 청년디자인리빙랩도 이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방식으로 할 수 있다고 산업부를 설득하면서 사업이 만들어졌다. 국민디자인단에는 사업 담당자인 지자체 공무원들이 참여한다. 그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이미 수요자 중심으로 일하고 있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현장의 연결되지 않은 엉성한 서비스는 왜 고쳐지지 않는 것인가. 왜 이런 착시가 생길까.
개념적으로 한쪽 끝에 100% 공급자 중심, 다른 쪽 끝에 100% 수요자 중심이 있다고 해보자. 아이디어는 자기 머릿속에서 출발하니 처음에는 공급자 쪽에서 시작해 점점 수요자 쪽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얼마나 이동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0.001밀리미터를 갔는지 1센티미터를 갔는지 모르는 것이다. 고객 중심의 경영을 하고 있다는 기업들조차 고객의 평가가 그 정도 수준이었다면, 우리 공공서비스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키오스크

박막례 할머니가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영상(막례는 가고 싶어도 못가는 식당)이 있다. 할머니는 사람 있는 곳이 점점 없어진다고 걱정하면서도 직접 해보겠다고 나선다. 글씨가 안 보이고, 화면을 내려야 메뉴가 나오는 줄 모르고, 카드를 어느 방향으로 넣어야 할지 헤맨다. 이 영상에서 배울 점이 많다. 할머니의 장점은 주저 없이 도전한다는 것이고, 무엇이 불편한지 말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젊은 사람도 언젠가 같은 처지가 된다고 말한다.
사용자를 관찰하면 깨닫는 것이 많다. 소수의 사용자가 실제로 이용하는 모습을 옆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니 꼭 해볼 만하다. 사용성 연구자 제이콥 닐슨은 사용자 5명만 조사하면 사용성 문제의 약 85%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글씨가 작다는 문제도 시력이 나쁜 사용자를 관찰하기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음식점과 공공서비스의 무인화는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수준으로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키오스크가 늘어나면서 불편을 겪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다 불편을 불편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직접 사용하는 모습을 관찰해야 무엇이 이용을 가로막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의 공급자 중심

아파트 단지 안 도로에 과속방지턱이 새로 생겼다. 사고가 난 자리다. 방지턱이 생긴 뒤 사고는 줄었을까. 오히려 더 났다. 운전자들이 방지턱을 피해 중앙선을 넘어 달렸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조치를 해야 했다. 우리나라에는 과속방지턱이 유난히 많다. 이것으로 해결될 일인지 의문이고, 무엇보다 사용자는 공급자가 예상한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여전히 공급자 중심이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몇가지 증거를 보여주겠다. 
샤워할 때 샴푸인 줄 알고 린스를 짜는 일이 종종 있다. 두 용기의 모양이 같고, 브랜드 이름이 가장 크게 표시되며 샴푸와 린스라는 글씨는 작기 때문이다. 제조사로서는 진열대에서 자사 브랜드가 먼저 보이고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드러나야 하니 포장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제도와 기술로 바꿀 수 있다. 샴푸 용기 옆면에 오돌토돌한 돌기를 넣고 린스에는 넣지 않으면, 눈을 감고 물을 맞으면서도 손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본의 한 생활용품 제조사가 1991년에 개발한 이 방식은 업계 전반으로 퍼져, 지금은 일본 제품 대부분에 적용되어 있다. 더 세련된 방법도 있다. LG생활건강의 디자인 콘셉트(디자인: 성정기 디자이너)는 용기 표면의 무늬 방향을 달리해, 가로무늬와 세로무늬로 샴푸와 린스를 구분하게 했다. 디자인 언어로도 통일감이 있는 좋은 디자인이다.
자판기는 오래전 등장한 이후 기본 구조가 거의 그대로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자판기를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본 기억이 없다. 물건이 나오는 출구가 아래에 있어 허리를 굽혀야 하니 어르신들은 불편해서 쓰지 않는 것이다. 기술이 접목되면 이 상황이 나아질까. 실제로는 전면이 터치스크린으로 바뀌었을 뿐, 출구는 여전히 아래에 있다. 어르신들은 여전히 쓰기 어렵다. 제조사는 어르신들이 고객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불편해서 쓰지 못하는 것인데, 쓰지 않으니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국민디자인단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장애인의 금융 이용에 관한 과제(장애인과 함께하는 금융 발걸음)였다. 금융권은 장애인들이 저축을 하지 않는다며 주요 고객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은행에 가는 길부터 문턱이 있고, ATM도 조작할 수 없었다. ATM 아래 공간에 휠체어가 들어가지 않으니 손이 조작부에 닿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박막례 할머니의 영상처럼 장애인 이용자를 직접 따라가 관찰하고서야 불편을 알았고, 이를 건의해 개선으로 이어졌다. 10년쯤 전의 일이고, 지금 ATM을 보면 그렇게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민감해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서비스든 정책이든 어르신이나 몸이 불편한 분들의 도움을 받아 개발해야 한다.
디자인은 오랫동안 빙산의 수면 위, 눈에 보이는 형태를 다뤄왔다. 사람의 행위와 경험, 상호작용으로 디자인의 대상이 넓어져 왔다. 제품의 형태를 결정하는 제품 디자인 중심의 인식에서 나아가, 지금은 학부와 석사 과정에 사용자 경험 디자인 전공이 생겼다. 사용자의 경험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조직 문화나 생태계를 만드는 일도 디자인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수영장과 셔틀버스

정책에서 디자인은 효율성 면에서도 절실하다. 한 작은 지자체의 수영장에 몇 달 전부터 사람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시의회는 수영장이 오래되어 낡았으니 리모델링하면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라 보고 공모를 냈다. 그런데 공모에 참여한 건축사가 첫 발표에서 리모델링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공무원들이 이유를 묻자, 조사해 보니 그 무렵 셔틀버스 운행 시간이 30분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수영장에 와서 친구들과 운동하고 출근하던 사람이 올 수 없게 되었고, 그가 오지 않으니 친구도 오지 않았다. 문제는 버스 시간을 조정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공공 부문의 정책 기획 단계에서는 이런 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럴 것이라는 전제로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수십억 원을 들여 랜드마크를 짓는다. 문제를 정의하는 단계에 디자인이 필요한 이유다. 사람들의 의견을 실제로 묻고 확인해야 한다. 기획 단계의 조사에 비용을 들이는 것이 낭비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이 사례가 그 답이 된다. 조사에 든 비용은 불필요한 리모델링 예산을 아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공고를 내고 절차를 밟아 특정 공간에 입체 조형물을 세우기로 정해지면, 디자인의 역할은 그 조형물을 보기 좋게 만드는 데 그친다. 이미 세우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조형물이 정말 필요한지를 따져야 하는데, 그런 단계가 없다. 디자인의 역할을 앞쪽으로 당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 전략 디자인, 서비스디자인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수요자가 잘 알고 말하는 존재인지, 그들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 영상이 있다. 패스트푸드 업체가 국내에서 커피를 출시할 때, 당시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며 찍은 사회 실험이다. 사람들에게 두 잔의 커피를 맛보게 하고 어느 쪽이 더 맛있는지 물었다. 참가자들은 비싼 커피가 신맛이 강하다거나 향이 깊다거나, 다른 쪽이 더 부드럽다거나 하며 길게 설명했다. 질문은 어느 커피가 더 맛있느냐였는데 설명이 지나치게 많다. 이런 반응에는 의미가 있다. 머릿속에서 달라야 할 것이 다르지 않으니 그 어긋남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인터뷰에서도 이런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아지면 그 안에 숨은 무언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요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100% 그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정책을 설계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강릉의 한 해수욕장 사례가 있다. 이용객에게 불편한 점을 묻자, 한 젊은 여성이 남성들이 자꾸 쳐다봐서 싫다고 답했다. 그래서 여성만 들어갈 수 있는 해수욕장을 만들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여성들도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2]  
정책 기획 단계에서 수요자의 의견은 주로 말과 글로 포착한다. 그런데 이게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만으로는 실제 필요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고, 말한 대로 구현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수요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이 바꾼 것들

지금의 어린이 칫솔 모양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어른 칫솔을 작게 만든 형태였다. 오랄비가 디자인 회사 IDEO에 어린이 칫솔 개발을 맡기자, IDEO는 먼저 아이들이 칫솔질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이들은 칫솔을 자꾸 놓치고 제대로 쥐지 못했다. 손 근육이 섬세하게 발달하지 않아 얇은 칫솔대를 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손잡이를 굵게 만들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를 씌웠으며, 입에 들어가는 머리 부분은 작게 했다. 이러한 관찰은 굵고 부드러운 손잡이를 가진 어린이 칫솔 개발로 이어졌다.[3]  이 사례는 놀라운 사실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 아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들을 관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디자인을 맡기면 예쁜 형태부터 그린다. 실제로 아이들이 어떻게 칫솔질하는지를 봐야 한다. 아이들은 말로 의견을 표현하기 어렵기도 하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행동을 관찰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것이 결국 기회를 만들고 산업을 바꾼다.
공항 사진 한 장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더운 나라에서 추운 나라로 온 여행자들이 수하물을 찾는 자리에서 가방을 열고 옷을 꺼내 갈아입는다. 갈아입을 공간이 따로 있는데도 그렇다. 이런 장면에서 서비스의 착안점과 개선 방안을 찾으려면 감각도 필요하다. 같은 자료를 보고도 누군가는 발견하고 누군가는 지나친다.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찾아내는 방법이 정책 과정에도 필요하다.
지금 정책 과정에도 수요자 의견을 모으는 방법은 많다. 공청회, 설문조사, 토론회 같은 것들이다. 공통점은 말과 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나오는 사람은 대개 협회장이나 동대표처럼 뒤에 수백, 수천 명을 둔 이들이다. 그들의 의견이 바깥으로 전달되지만, 그것만으로 수요자의 경험을 충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른 방법은 사회조사와 민속지학, 문화인류학에서 찾을 수 있다. 베인앤컴퍼니의 조사에서 드러난 공급자와 수요자의 평가 차이는 컸다. 공급자와 수요자가 금성과 화성에서 온 사람처럼 다르다는 뜻이다. 다른 집단을 이해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문화인류학자가 아프리카의 작은 부족을 연구할 때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알아내는 것이 매우 많다. 인터뷰로 알 수 있는 것은 피상적인 문제가 많다. 인터뷰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관찰을 하면 아이들의 칫솔 문제나 자판기 앞 고령자의 문제를 알 수 있다. 가장 깊은 단계는 함께 워크숍을 하는 것이다. 국민디자인단이나 청년디자인리빙랩 같은 활동을 하다 보면 참여자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를 함께 경험할 기회가 생긴다. 지금의 정책 개발은 대부분 말과 글에 기대고 있다. 관찰과 함께 만들기를 정책 개발에 들여야 한다.

불편을 감지하는 감각

일본의 트라이포드 디자인은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이름난 제품 디자인 회사다. 나카가와 사토시가 이끄는 이 회사는 1만 명 규모의 사용자 집단을 관리한다. 어깨가 아픈 사람, 손가락이 아픈 사람처럼 불편의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어, 볼펜을 개발한다면 손가락과 어깨가 불편한 사람들로 태스크포스를 꾸린다. 절반은 디자이너, 절반은 불편을 겪는 사용자다. 젓가락을 개발한다면 사용자가 음식을 몇 번 찔러 먹는지, 떠서 먹는지를 관찰한다. 그다음에는 디자이너가 자기 몸에 테이핑을 해 같은 불편을 재현하고,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직접 경험한다. 이렇게 하면 디자이너의 감도가 높아진다. 불편함에서 오는 위화감을 알아차리는 민감성이 길러진다.
냉장고 문을 여는 이미지에서 무엇을 알 수 있나. 손잡이를 잡은 손의 엄지로 반대쪽 문을 밀고 있다.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연구가 있은 뒤 손잡이를 잡으면 문이 밀려 열리는 구조가 나왔고, 지금은 많은 냉장고가 그렇게 되어 있다. 서너 살 아이도 열 수 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이것이 불편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이 발견은 비디오 에스노그래피라는 관찰 방법에서 나왔다. 가정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한 달 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처음 일주일쯤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의식하므로 그 자료는 버린다. 그 뒤로는 평소 모습이 드러나고, 물건을 왜 저렇게 놓는지, 냉장고 안에 식기를 왜 저렇게 배열하는지를 보며 제품 개발의 실마리를 얻는다.
결국 감도 높은 안테나를 세우고 사용자를 깊이 이해해야 하며, 그러려면 민감성과 공감력이 필요하다.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무던하게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 건강하게 일상을 사는 사람은 대체로 무던한 편이다. 박막례 할머니 같은 분들은 그것을 민감하게 느낀다. 무엇이 불편한지 잘 알지만, 잘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다니며 관찰해야 알 수 있다.
문제에는 층위가 있다. 문제가 분명하고 해결 방법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문제는 드러나 있지만 해법이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다. 문제는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 불편한 영역이 있고, 문제로도 불편으로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마지막 영역은 공공 부문이 먼저 포착해 개선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대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하고 이런 문턱쯤은 쉽게 넘기 때문에 문제를 알기 어렵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도움이 필요하고, 디자이너도 장애인과 노약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참여의 기회가 중요하다.
미국 미술대학의 타이포그래피 교재에는 거의 같아 보이는 두 문자열을 나란히 놓고 위는 나쁘고 아래는 좋다고 표시한 페이지가 수백 장 실려 있다. 차이는 글자 하나의 미세한 형태에 있다. 형태에 대한 민감성을 오래 훈련한 사람은 그 어색함을 곧바로 짚어낸다. 위화감에 대한 민감성의 문제다. 디자이너는 이런 훈련을 평생 한다. 장애인과 고령자는 생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같은 훈련을 하게 되고, 그래서 불편을 쉽게 발견한다.
어머니가 생수병 뚜껑을 열지 못하시는 모습을 봤었다. 뚜껑을 여는 도구도 있지만 그 역시 쓰기 불편하다. 소재를 줄이느라 뚜껑이 손에 닿는 면적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그러니 나이 드신 분들은 뚜껑 여는 도구를 따로 살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수요자의 참여가 필요하고, 그중에서도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개발 과정에 끌어들여야 한다. 청년디자인리빙랩도 그런 차원에서 지역 주민과 다양한 사용자를 관찰하는 방법을 시도하는 사업이다.

수출 포장에서 출발한 디자인 진흥, 그리고 디자인진흥원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산업통상부 산하 기관으로, 디자인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신인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1970년에 설립되었으니 2026년으로 56년이 되었다.[4] 돌이켜보면 디자인 진흥 기관이 생기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1970년은 경제개발계획의 초창기였고, 우리나라는 될 만한 산업 몇 개를 골라 자원을 집중하는 불균형 성장 전략을 택하고 있었다. 산업부가 오랫동안 해온 역할도 그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수출을 늘리려면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손재주가 좋은 우리나라의 신발과 가발 같은 소비재가 해외에서 많이 팔렸지만 제값을 받지 못했다. 국가 브랜드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포장이 조악해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컸다. 그래서 국민 인식과는 거리가 먼 시점에 디자인 진흥 기관이 생겼다. 
설립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어떤 산업을 키우겠다고 마음먹으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해내곤 했다. 진흥원도 그런 흐름 속에서 수출용 소비재의 포장을 개선하는 일을 주로 했다.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이 본격화되면서 정책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 작은 소비재를 팔아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중화학공업으로 성장한 일본을 모델로 삼았다. 포철을 세우고 거대한 산업단지를 조성했으며, 정유와 제철처럼 대형 장치가 있어야 생산할 수 있는 제조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산업에서 디자인이 기여할 몫은 크지 않았다. 진흥원은 앞서 생겼지만, 생긴 직후 정부 기조가 바뀌면서 역할이 미묘해진 셈이다. 그 선택이 잘못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는 그 길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 다만 그 이후로 정부가 디자인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는 설립 초기만큼 다시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문화선도산단이라는 패키지

산업단지는 낡은 이미지 때문에 청년들이 직장으로 선택하기를 꺼리는 곳이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문화선도산단 사업이 만들어졌다. 사업은 짧은 기간에 여러 부처의 사업을 묶는 방식으로 꾸려졌다. 그 과정에 진흥원이 참여하면서 문화선도산단 안에 서비스디자인이 역할을 할 영역이 생겼다. 
현재 문화선도산단은 산업부, 문체부, 국토부의 세부 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원래 있던 사업을 짜 맞춰 패키지로 묶고 문화선도산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급하게 만들어진 탓이다. 그 가운데 새로 생긴 사업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부 사업 중 규모가 가장 큰 랜드마크 조성이고, 다른 하나가 청년디자인리빙랩이다. 청년디자인리빙랩 및 브랜딩이라는 이름에는 두 사업이 합쳐져 있다. 브랜딩은 1억 원 규모로, 1차 연도에 산업단지의 이름과 시각 아이덴티티를 만든다. 인천 남동공단이 별도의 단지 이름을 쓰는 것처럼 네이밍을 하고 시각물을 개발하는 일이다. 랜드마크는 말 그대로 인프라를 짓는 사업으로, 지자체가 부지를 정하고 어떤 목적의 건물을 지을지 계획을 낸다. 청년친화 리뉴얼은 오래도록 이어진 노후 공장 리뉴얼 사업이고, 아름다운 거리 플러스는 하천변 러닝 코스나 야간 경관처럼 지자체의 거리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이다. 휴폐업 공장 리모델링, 비용을 지원하는 펀드도 있다. 문체부의 문화가 있는 날과 문화가 있는 산업단지는 산단 인근의 축제나 행사를 지원하며, 문체부 예산은 대체로 지역 행사와 연계해 집행된다. 국토부 사업은 주로 토지와 개발에 관한 것이다. 이 중 청년디자인리빙랩, 브랜딩, 랜드마크 세 가지를 묶어 브랜드 산단 조성을 위한 문화 브랜딩 지원이라고 부른다. 
브랜드의 영역은 생각보다 넓다. 로고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로고는 간판에 쓰이고, 각종 시설물과 공간, 서비스에도 영향을 미쳐 지자체의 수많은 활동 속에 표현된다. 길찾기 시스템에도 어딘가에 브랜드가 드러나야 한다.
산단 브랜드는 아니지만 좋은 예가 포르투갈의 포르투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정도에 해당하는 제2의 도시인데, 아줄레주라 불리는 전통 타일이 도심 경관을 이루고 있다. 포르투는 이 타일을 모티프로 도시 브랜드를 만들었다. 작은 그림 하나하나가 타일 한 장이 되고, 그 타일이 모자이크처럼 이어져 도시의 이름을 감싼다. 이 브랜드는 길찾기 표지, 공사장 펜스, 박물관을 비롯한 공공기관 곳곳에 반복해 쓰이면서 도시 전체의 정체성을 만든다. 외지인의 눈에는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새로움과 고전적 가치가 함께 보인다. 잘 만들어진 도시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한다.[5] 물론 이는 브랜드 개발 예산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자체가 그 철학을 품고 여러 사업마다 반영할 때 실현된다.

계획을 바꿀 수 있는 사업

청년디자인리빙랩은 문화선도산단 전체의 기획 역할로 만들어졌다. 과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수요자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그로부터 계획을 세우자는 취지다. 비슷한 예를 찾자면 도시재생 사업의 리빙랩 정도가 있을 뿐, 정부 공모 사업에서는 유례가 드물다. 정부의 대규모 공모 사업은 대개 지자체가 제안서를 꾸려 응모한다. 제안서를 쓸 수 있는 시간은 두 달, 길어야 세 달이다. 그 안에 지자체 주무관이나 외부 업체가 2천만 원 안팎의 예산으로 제안서를 쓴다. 수요자 의견을 충분히 듣거나 그것이 실제로 지역 주민이 원하는 서비스인지 검증할 여유가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안서를 심사해 줄을 세우고, 예산 범위 안에서 선정되면 3년이든 5년이든 지원이 이어진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계획이 통과된 뒤에 훨씬 좋은 아이디어나 개선 방안이 나와도 실행되지 않는다. 사업 계획을 변경하는 일이 지자체에도 부처에도 번거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획은 엉성하게 만들어지고, 실행은 그 엉성한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관행이 생겼다. 청년디자인리빙랩은 이 관행을 뒤집으려는 사업이다. 그래서 공모 지침에 지자체가 리빙랩 운영에 협력해야 하며, 운영 결과를 도입하기 위해 필요하면 기존 사업 계획을 변경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을 넣었다.[6] 이미 통과된 계획이라도 리빙랩의 결과를 반영해 변경할 수 있게 하겠다는 뜻이다. 랜드마크 등 인프라 조성 사업의 사후 관리와 운영 계획도 명기하고 리빙랩과 긴밀하게 연결하도록 했다. 진흥원은 각종 설명회에서 이 사업의 의미를 알리고 있다. 선례가 없는 사업이라 작년에 처음 운영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청년디자인리빙랩은 선정된 산단마다 디자인 수행사를 뽑아 4년간 운영한다. 2025년에는 구미·완주·창원에서 시작했다. 지역의 수요자가 문제를 발견하고, 서비스디자인 기업과 함께 과제를 개발하며, 이를 시범운영으로 이어가는 구조이다.[7]

리빙랩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리빙랩은 산단마다 연 2.5억 원씩 4년간, 모두 10억 원이 들어간다. 이 예산으로 지역에서 일할 서비스디자인 기업을 선정하고, 그 기업이 현지 의견을 대표하는 대표단을 운영한다. 수요자 패널 역할을 할 200여 명의 참여단도 모집해, 반복적인 워크숍과 모임에서 아이디어를 낸다.
1차 연도에는 참여자들이 지역에서 수요자로서 직접 경험해 보고, 현장을 관찰하며 문제를 파악한다. 시야를 가린 채 장애인이 이 환경을 어떻게 경험할지 모의로 체험해 보는 식이다. 이런 조사를 통해 1년 동안 10개 안팎의 과제를 개발하고, 그중 2개를 골라 심층 기획서를 작성하고 다음 연도의 시범운영으로 이어간다. 시범 운영은 프로토타이핑을 하거나 현장에 부스를 차려 짧게 운영해 보는 형태다. 2차 연도는 하드웨어 중심, 3차 연도는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해마다 두 과제씩 시범 운영한다. 4차 연도에는 사업이 끝난 뒤에도 서비스가 지역에 남도록 운영할 스타트업을 찾거나, 이를 넘겨받을 지역 기업을 지원하거나, 지자체 정책 사업으로 예산을 편성하는 구조를 만든다.
추진 체계를 보면, 문화선도산단은 3개 부처 협력 사업이고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주관한다. 진흥원은 청년디자인리빙랩을 관할하며, 대표단, 서비스디자인 기업, 지역 참여단이 리빙랩의 구성원이다. 브랜드 개발은 작년까지 지자체가 맡았으나 올해부터 진흥원이 함께 운영한다.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대표단이다. 지역별로 10명 안팎이며, 지역 청년 노동자와 함께 관할 공공기관이나 지자체의 팀장급 담당자가 참여한다. 대표단을 중심으로 워크숍과 현장 관찰, 리서치가 반복된다. 지역 참여단은 일종의 온라인 패널이다. 다양한 아이디어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때 설문 형태로 의견을 모은다. 전문가 그룹인 서비스디자인 기업은 워크숍을 운영하고 서비스를 설계한다. 지자체 산하 기관도 참여하는데, 작년 경험으로는 지자체 산하 문화재단이 많이 관여했다. 문체부 예산으로 문화가 있는 날 같은 활동을 해온 곳이라 이 사업에서 지자체를 돕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산단이라면 산업단지공단 지역본부도 참여한다.
수행사는 산단이 선정된 뒤 공모로 뽑으며, 2-3개월 가량 걸린다. 지역 기업이 선정되기도 하지만, 디자인 회사가 서울과 경기에 몰려 있어 그쪽 회사가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수행사 선정에서는 가격 비중을 10%로 낮추어 역량 중심으로 평가했다. 단계별로 무엇을 해야 하고 다음 단계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등 진흥원이 총괄 관리한다. 한 수행사가 4년간 한 지역을 맡아 그 지역 특색에 맞는 서비스를 개발하게 된다. 진흥원 안에는 문화선도산단만 전담하는 디자인문화팀이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결과 점검 때는 자문위원회가 참여한다. 작년의 1년 일정을 돌아보면 절반가량을 산단 선정, 수행사 선정 절차에 썼고, 대표단이 꾸려진 뒤부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대표단은 평균 다섯 차례 한나절 이상의 워크숍을 했다. 수행사가 그동안 정리한 내용을 공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발전시키는 방식이었다. 연말에는 3개 산단이 함께 결과공유회를 열었다.

아이디어가 과제가 되기까지

작년 3개 산단에서 산단별로 12개에서 14개 정도의 아이디어가 정리되었다. 연말에 지자체와 협의해 2차 연도에 시범 운영할 과제를 정했고, 올해 이를 운영했다. 1년간의 결과물은 자료집으로 엮어 진흥원 웹사이트에 전문을 공개했다. 언제 어떤 활동을 했고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조사 내용은 무엇인지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업은 다른 사업에 비해 중간 산출물을 꼼꼼하게 정리해 공개하는 편이다. 그 덕분인지 2차 연도에 응모한 지자체들의 계획서 수준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활동의 중심은 조사다. 문헌조사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 나가 인터뷰하고 관찰하는 활동의 비중이 다른 사업보다 훨씬 크다. 창원을 예로 들면, 산단을 대표할 사용자를 정해 한 사람의 캐릭터로 만든다. 이를 퍼소나라고 부른다. 그 퍼소나의 특징과 욕구를 구체적으로 정해 두고, 이 사람이 서비스를 접하면 어떻게 이용할지 상상한다. 
고객여정맵은 한 사용자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부터 그것이 해소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르내리고 색이 바뀌는 선은 그 사람의 감정선이다. 감정이 떨어지는 지점이 있으면 그 직전의 경험을 문제로 공유할 수 있다. 이렇게 시각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논의가 가능해진다.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명시적으로 알게 되고, 어떤 방법으로 개선할지 토론할 수 있다. 서비스디자인 워크숍에서는 벽에 고객여정맵을 붙여 놓고 그림을 그려가며, 감정이 왜 떨어졌는지 포스트잇으로 의견을 붙이고, 개선 아이디어에는 스티커로 투표한다. 그렇게 나온 이슈의 실제 원인과 인과관계를 다시 따져 콘셉트를 만들고, 그 콘셉트에 따라 아이디어를 낸다.
1년 동안 청년디자인리빙랩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약 200개였다. 이를 합치고 덜어내 산단별 10개 안팎으로 정리한 뒤, 각 아이디어의 시나리오를 쓴다. 창원의 콘셉트 무기 대전이 그런 예다. 창원은 방산 산업이 강한 곳이지만 지역 주민 중에도 이를 모르는 이가 많다. 기존 방산 전시회는 제조사 중심으로 제한된 사람에게만 공개된다. 그래서 게임과 영화 같은 콘텐츠에 등장하는 미래 무기의 아이디어를 재미있게 소개하는 전시를 열어, 지역 산업을 주민에게 친근하게 알리자는 구상이다. 이 전시가 어떻게 운영되고, 어떤 콘텐츠를 담고, 사람들이 무엇을 경험할지를 시나리오와 영상으로 만들고, 추진 체계와 역할 분담을 구조화한다.
연말에 선택된 2개 과제는 2차 연도 초반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짠다. 창원에서는 반려 가로수 같은 아이디어도 나왔다. 오래된 지역이라 큰 가로수가 많은 창원에서, 가족 이름을 붙인 가로수를 주말마다 돌보게 하자는 아이디어다. 아름다운 거리 조성 사업에 반영할 수 있다. 실행 계획에는 필요한 자원, 담당 부서, 도움을 받을 지역 민간 기업까지 담긴다.
서비스 블루프린트도 쓰인다. 서비스의 설계도라고 이해하면 된다. 맨 윗줄에 고객 여정이 있고, 그 아래로 제공자가 각 시점에 해야 할 역할이 표시된다. 가로축은 시간이고, 세로축은 고객에게서 가까운 접점부터 뒤편의 지원 체계까지 이어진다. 고객이 어느 시점에 휴대전화로 문자를 받아야 한다면, 그 뒷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모두 정의해 두는 것이다. 이것이 그려지면 어느 부서가 무엇을 하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관계자가 명확해진다.
올해 4월에는 산업부 장관이 문화선도산단을 보고 싶다고 해, 작년에 운영한 3개 산단이 모두 모여 1박 2일 해커톤을 열었다. 115명가량이 모여 첫날 밤늦게까지 작업하고 다음 날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행사 자료집과 참여자 인터뷰도 진흥원 게시판에 공개되어 있다.

시범 운영에서 본 가능성

2026년에는 구미·완주·창원에서 산단별로 두 과제씩 시범운영했다.
구미의 인도어 팜은 산단 안에 식물 재배 공간을 두고, 사람들이 함께 경작하고 퇴근 후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한 과제다. 바질은 정말 빨리 자랐다. 수확한 작물로 요리를 하려면 진행자가 필요하니 요리 프로그램도 엮었다. 4주 동안 운영했고 참여자 반응이 좋았다. 지속 가능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구미의 또 다른 과제는 지역 기업을 알리는 일이었다. 구미에는 오래되고 탄탄한 기업이 많지만, 그 기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청년들이 있다. 그래서 구미역에 지역 기업을 소개했는데, 첫 대상은 건반 악기를 만드는 다이나톤이었다. 참여를 신청한 청년들이 공장을 방문해 인터뷰하고, 입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인사 담당자에게 회사에 대해 묻는 역면접 워크숍도 열었다. 지역 주민들의 반응이 좋았다.
완주에서는 완주군이 운영하는 XR 버스를 타고 지역의 고택과 도자기 공방을 방문해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했다. 오감재라는 과제도 있었다. 완주에는 외부에서 2주나 한 달씩 장기 파견 근무를 오는 직원이 많지만, 이들이 머물기에 적합한 숙박시설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공용 라운지를 근사하게 꾸민 숙박 시설을 구상했다. 랜드마크가 완성되기 전이므로, 그 안에 캡슐호텔을 짓는다면 앞쪽 라운지를 어떻게 꾸밀지를 미리 모의 실험해 본 것이다. 향기와 음악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경험을 공간에 담아 시범 운영했다.
창원의 틈새 쉼터는 아름다운 거리 조성 사업과 연결해 구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러닝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청한 주민들이 함께 달리고 티셔츠도 나눠 받았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즐거워했다. 이 과제에서 느낀 점이 있다. 창원에는 대기업 사업장을 비롯해 젊은 직장인이 많지만, 이들끼리 교류할 매개가 없다. 각자 기숙사에서 지낼 뿐이다. 그런데 이런 통로를 하나 열어 주자 이들은 즐겁게 모였고, 짧은 기간에 친구가 되었다. 공감대가 있는 젊은 직장인들은 만나면 금방 가까워진다. 다만 누군가 판을 깔아 주어야 한다. 지자체일 수도, 다른 기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잘 이끌 사람이 필요하다.
창원에서는 그룹 운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호주 기업 F45의 지역 센터에서 도움을 받았다. 진행자가 분위기를 잘 이끌었고, 참여자들이 지치지 않을 수준으로 강도를 조절했다. 많은 시설이나 장비도 필요 없었다. 물 한 잔과 티셔츠, 옷을 갈아입을 공간 정도면 충분했다. 비용은 크지 않지만 그것을 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전국적인 체계로 확산해도 좋다고 본다. 산단마다 이를 연결할 누군가가 있다면, 여러 지역에 있는 운동 센터와 함께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지자체나 지역 기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한 기업 직원만으로 꾸리기보다 여러 사람이 교류할 수 있게 해야 좋은 프로그램이 된다.
창원의 방산 전시는 콘셉트 무기 대전을 작게 프로토타이핑한 것이다. 무기 전시는 대규모 컨벤션 시설이 있어야 가능하고, 이는 랜드마크가 지어지고 그 안에 설비가 생긴다는 전제에서만 실현된다. 지금은 그런 시설이 없으므로 창원대학교와 함께 소규모 전시를 열어, 어떤 콘텐츠를 담을지와 반응이 어떤지를 시험했다.[8]

정책 과정의 두 빈칸

이런 정책 프로토타이핑은 우리 정책 과정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기존 정책 과정에 두 가지 큰 허점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기획이 없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제안서는 세 달 이내에 만들어지고, 기획에 자원과 예산을 제대로 배정하는 지자체는 거의 없다. 요령껏 만드는 것이다. 정부 R&D만 해도 기획 단계가 있고 거기에 예산이 배정된다. 정책에는 그런 기획 단계가 빠져있다.
둘째는 실행 전에 시험해 보는 단계가 없다는 점이다. 리빙랩이 바로 이 역할을 한다. 도시재생 사업도 같은 문제를 느꼈기에 이 단계를 넣었을 것이다. 내가 살펴본 해외 리빙랩 사례들은 주로 이 단계에 집중했다.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고, 그 계획을 실험으로 검증하는 활동이다. 청년디자인리빙랩은 이름은 리빙랩이지만 기획과 검증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4차 연도에는 현지 이관에 집중한다. 여러 전략이 있겠지만, 지자체가 정책 사업으로 예산을 편성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예를들어 성남시는 청년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공지가 나가면 금방 마감될 정도로 반응이 좋다. 청년들 사이에 교류에 대한 요구가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굳이 만남을 앞세울 필요는 없지만, 참여자가 프로그램에 지속 참여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운동은 그런 점에서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미리 만들어 보는 일

디자인 개발 과정에서는 임시로 만들어 보는 일을 많이 한다. 건축가가 탁자 위에 작은 모형을 올려 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서비스가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을 모사해 보는데, 이를 테이블 워크스루라고 한다. 탁자 위에 인물 모형을 놓고 각자 역할을 맡아 실제처럼 운영해 본다. 레고가 이런 작업에 많이 쓰인다. 레고에는 이 용도로 만든 시리어스 플레이라는 제품 라인이 있다. 시민과 공무원 같은 역할을 표현할 수 있는 블록들이다. 이 방법을 익히는 교육과 행사도 세계 곳곳에서 열린다. 이것을 규모를 키워 사무실 공간을 꾸며서 역할극을 하기도 한다. 연극하듯 해보면 이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 말로 설명할 때보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기록한다.
이렇게 어느 정도 정교하게 다듬은 뒤에는 결국 현장에 나가 실제로 해봐야 한다. 창원과 완주의 프로그램이 바로 이 단계였다. 현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고, 참여자 의견도 그 자리에서 모을 수 있다. 이런 시범 운영은 지역 사업, 특히 지역 행사와 연계하면 부담이 줄어든다. 행사장에 부스를 차려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는 방식이다.[9]

정부 안에서 일하는 디자인

청년디자인리빙랩처럼 기획에 비용을 들이는 일이 오래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도 지금이 시기적으로 적절해 시작된 것이지만 길게 이어질지 걱정이 있다. 다만 세계적으로는 이런 흐름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영국의 Policy Lab은 정책 기획 단계에서 디자인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준다. 디자인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정책개발 과정에 연결하고, 공무원들과 함께 정책을 기획하는 조직이다. 영국 폴리시랩처럼 정부, 지자체에 디자인 방법을 기획단계에 도입하는 조직은 세계에 1백개 이상 존재한다.
코로나19 대응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제시한 ‘시스템으로서의 정부’ 도구가 그 예이다. 이들은 정부가 할 수 있는 활동 영역 전체를 하나의 틀로 정리한 도구를 만들었다.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여러 활동을 배열하고, 상황에 따라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한 것이다. 이런 도구를 놓고 관련 부처가 각자 무슨 역할을 할지 논의할 수 있다. 초기 단계에는 정부의 역할을 어디에 집중할지, 확산 단계에는 역할과 자원을 어떻게 넓힐지 살펴보는 것이다.[10]  
각 부처가 따로 일하는 방식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한 부처만으로는 풀 수 없는 이른바 사악한 문제가 계속 나타난다. 고령화가 그렇고 지역 소멸이 그렇다. 이런 문제를 풀려면 여러 부처를 아우르며 디자인의 관점으로, 수요자의 입장에서 해결책을 찾는 활동이 필요하다. 정책 랩은 그렇게 등장했고,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 정부로 확산되어 있다. 2018년부터 한국행정연구원이 공무원들이 왜 디자인을 도입하고 배우는지를 정책 랩을 중심으로 연구한 바 있다. 나는 디자인 도구를 보급하는 데서 나아가, 디자이너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 안에서 직접 일하는 구조가 중요하다고 본다. 
민간에서는 미국 메이오 클리닉의 혁신센터가 인상적인 사례이다. 병원 안의 혁신 조직에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의료서비스를 바꾸는 일을 했다.[11] 병원의 핵심 조직에 디자이너가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지만, 이들은 여러 직군을 연결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함께 찾고, 조직 문화를 바꾸며,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한다. 디자인이 조직 안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안정과 변화의 협업

새 산업단지를 계획할 때 디자인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있다. 나는 두 가지가 있다고 답하겠다. 하나는 수요자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불편을 찾아 거기서 해결책을 끌어내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이 어떻게 구현되면 좋을지 그려보는 일이다. 국가의 미래 정책을 구상할 때도 디자인 워크숍을 많이 한다. 앞으로 만들어질 산단에서 어떤 서비스가 필요할지 상상할 때도 미래 시나리오를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더 있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는 활동이 도움이 된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다. 이런 작업을 관성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창작자, 예술가, 만화가처럼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역할을 주면 어떨까. 다소 산만해질 수는 있다. 나는 예전에 보건복지부의 미래 의료 시나리오 작업에 100명가량과 함께 참여한 적이 있다. 참여자 대부분이 의사나 의료 분야 연구자였고, 나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결과물은 예상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에게 기획을 맡기느냐가 그만큼 중요하다. 새로운 구상을 하려면 늘 기획하던 사람들과 함께 외부의 창의적인 사람들이 참여해, 창을 활짝 열어젖힌 뒤의 세계를 그려보는 것이 좋다.
의사와 디자이너, 공무원과 디자이너는 일의 성격이 양 끝에 있다. 무릎 수술을 받는다면 어제와 다른 새 기술을 시도하는 의사보다 같은 수술을 수백 번 해본 의사를 찾을 것이다. 의사와 공무원의 일은 검증된 일을 안정적으로 반복하는 데 가치가 있다. 무모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다. 디자이너는 반대편에 있다. 비슷한 것을 반복해서 만드는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로서 가치를 잃는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구상할 때 디자이너가 적합하고, 수요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특성도 있다.
메이오 클리닉이 내부에 디자이너를 많이 두고 영국이 Policy Lab을 운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정을 지키는 조직 안에서 디자이너는 균열을 만들고 변화를 일으킨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사람들만 모인 조직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그렇기에 두 성향이 한 팀에서 협업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정부 조직에도 혁신담당관, 혁신어벤져스, 청년보좌관 등의 역할이 있고, 젊은 인재를 채용해 혁신 업무를 맡기기도 한다. 혁신가의 역할은 평가 부서 안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평가 부서가 권한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평가는 관리와 통제의 기능이다. 그런 자리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쉽지 않다. 정책 랩이나 메이오 클리닉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혁신의 역할을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과 구조에 맡기고 있다. 그것이 관건이다.

공공기관과의 협력

디자인진흥원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의 일도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진흥원의 기본 임무는 정부(산업부)의 디자인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7개 지역 센터를 통해 지자체와도 일하고 있고, 공기관과 협력하는 경우가 있다. 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은 한국남부발전과 사업장 안전디자인을 개발한 적이 있다. 단, 민간 디자인기업이 수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리빙랩 같은 사업을 수행할 전문 기업이 충분한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것도 자주 받는 질문이다. 서비스디자인이라는 영역이 등장한 지 15년쯤 되었다. 국내에 등록된 디자인 회사는 약 1만 7천 개이고, 그중 서비스디자인을 하는 곳은 300개 정도다. 아직 비중이 작은 것은 공공 부문 외에는 일거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이미 내부 역량으로 잘하고 있고 외부에 일을 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역량 있는 디자이너를 에이전시에서 데려간다. 그런데 한 나라의 디자인 수행 역량은 결국 디자인 에이전시의 역량이다. 강한 에이전시가 있어야 다른 기업이 의뢰해 좋은 성과를 얻는다. 국내 디자인 기업은 대표를 포함해 평균 5명 정도로 대부분 영세하다. 현장 관찰과 워크숍 운영처럼 인력이 많이 드는 일을 하기에는 아직 여건이 부족하다.

새 산업단지를 계획한다면

새로운 산업단지를 계획할 때도 수요자의 입장에서 앞으로 어떤 서비스가 구현되어야 할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 있는 환경의 불편을 찾는 일과 함께,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상상하고 그 안에서 무엇이 필요할지 그리는 일에 디자인이 기여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구상을 할 때 누가 참여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늘 계획을 세우던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함께해야 한다. 수요자의 보이지 않는 불편을 찾아내는 사람,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 그곳에서 실제로 살아갈 사람에게 개발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청년디자인리빙랩도 지역 주민과 다양한 사용자가 참여하고, 그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함께 과제를 개발하는 사업이다. 이런 참여가 개발 단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업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정책 앞단에 디자인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이다.


2026.10.28. 윤성원

미주

[1] Bain & Company, “Closing the Delivery Gap”, 2005. 362개 기업 조사. 8%는 만족한 고객의 비율이 아니라 고객의 평가에서 뛰어난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난 기업의 비율이다. 원문. ↩

[2]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 성공? 피서객은 작년의 절반. 2014.7.29. 연합뉴스 ↩

[3] Tom Kelley, “Field Observations with Fresh Eyes”, Stanford Technology Ventures Program, 2008.11.12. 어린이 칫솔 개발 당사자의 사례 설명. 영상 및 소개. ↩

[4] 한국디자인포장센터, 『디자인포장 10년: 1970~1979』, 1980. 한국디자인진흥원 공개 자료. ↩

[5] White Studio, “New City Identity for Porto, Portugal”, European Design Awards, 2015. 개발팀의 프로젝트 설명. ↩

[6] 청년디자인리빙랩의 사업계획 변경 취지와 산단별 예산·추진 체계·연차별 운영에 관한 설명은 필자의 사업 운영 경험에 근거한다. 공개된 사업 목적과 첫해 추진 결과는 위 통합 결과모음집을 참고할 수 있다. ↩

[7] 한국디자인진흥원, 「2025 구미·완주·창원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통합 결과모음집」, 2026.3.10. 자료. ↩

[8] 한국디자인진흥원·디자인선, 「구미산단 청년 아이디어로 만든 힐링텃밭·기업투어 프로그램 시범운영」, 2026. 구미 안내. 창원·완주 시범운영 자료 및 후기는 한국디자인진흥원 자료실 참고. 현장에서 느낀 참여자의 반응과 가능성은 필자의 경험과 판단이다. ↩

[9] 영국 Policy Lab, “Open Policy Making toolkit: 4. Delivery: prototyping and improving ideas”, 2016, 2017년 갱신. 모형과 역할극 등을 활용하는 프로토타이핑 방법. 원문. ↩

[10] 영국 Policy Lab, “Introducing a Government as a System toolkit”, 2020.3.6, 원문; “Government as a system for COVID-19”, 2020.4.22, 원문. 코로나19 대응을 분석하는 도구의 활용 제안이다. ↩

[11] Mayo Clinic, “Mayo Clinic Convenes Thought Leaders to Discuss Transforming Health Care Delivery”, 2014. 의료 현장에 참여한 디자이너와 혁신센터의 디자인씽킹 활용에 관한 자료. 원문. ↩